나는 무엇을 위해 ?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God 노래의 가삿말이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지옥같은 3월이 지나면 꽃 피는 4월에는 두 발로 걸어다니고 고개를 빳빳이 들어 하늘을 볼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눈은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표현이 얼마나 와닿을지 모르겠지만, 안간힘을 써서 겨우 짬을 내고, 억지로 웃고 농담하며 아이들과 마주한다.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면서도 누구보다 권위적이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했던 지난 2-3년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작년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올해의 시작은 그 어느 때보다 환상적이었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하게 나를 바라봤다. 나는 힘을 내어 수업을 준비했다. 학년부장에, 학년 교육과정에, 직능부장으로서 맞춤형 평가 업무 관리와 교생지도까지했고, 졸업앨범과 수학여행 기획 등을 처리했다.
3학년 교생 선생님을 처음 만나는 금요일 오후, 나는 학부모와 통화를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교생은 내가 학부모와 상담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고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심각한 일은 아니었고 늘 학교에서 있을법한 이야기지만, 수업을 배우러 온 교생이 학생 지도와 학부모 상담이란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교생들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2주간 수업을 같이 준비하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교실에 서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어야 했다. 교생 눈에 너무 짠하고 힘들 것 같은 이 모습을 잊고 교실에 빨리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교육은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이가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연속이란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나는 바쁜 3월을 보내는 와중에도 안간힘을 써서 아이들과 눈맞춘 것처럼, 또 다시 안간힘을 써서 수업안을 같이 고민하고 피드백해주었다.
교생선생님께서 남겨 주신 편지만 읽어보면, 분명 두 분은 나로 인해 좋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고민이 많았는데 교실에 서보고 싶은 용기와 마음을 조금이나마 심어준 것에 나는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 2주간의 기간이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나를 찾아오는 여러 가지 분노스러운 일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몸소 보여주고자 했던 '그 이유'를 내게서 스스로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전담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 시간은 음악시간이다. 아이들은 나의 음악시간을 기다린다. 기계를 쓰지 않고 항상 선창해준다. 아이들은 따라 부른다. 교과서 노래는 거의 부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노래를 골라 신나게 부른다. 신나게 노래할 기대를 품고 앉아있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행복하게 노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부르는 이 노래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부르는 것인가? 행복하기 위해서, 즐거움을 위해서라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고 즐거울 수도 없는 상태다. 그런데 아이들 앞에선 또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배움의 지점을 찾고 그곳으로 데려다 주어야 한다.
나는 방황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방황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다.
가르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배움을 기대하지 않는 이들의 방해에 온전히 나를 유지하려면, 나를 버티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무언가를 여태껏 가르침에서 찾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눈 앞에서 사라진 기분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가르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