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임 줍는 교실살이-3] 이토록 솔직한 아홉살 인생
참 신기하다.
같은 사람인데, 아홉 살 인생인 아이들과 나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다른 것 같다. 기억이 잘 나지도 않는 아홉 살 시절, 나도 이 아이들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살았을까? 굳이 나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몇 년 후에 이 아이들이 폭풍성장해서 질풍노도(?)의 5, 6학년이 된다는 사실이 참말 믿기지 않는다.
아홉 살들과 보내는 하루하루 가운데 요즈음 특히 기억에 남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1. 발표하고 싶어요.
우리 반 아홉 살들은 아직 특별히 수줍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아는 것은 목청껏 크게 말하길 즐긴다. 만약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거나 손을 많이 들지 않는다면, 내 탓이 크다.특별히 아이들이 들뜬 날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내 말이 알아듣기 너무 어려워서 내 말을 배경음악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소 귀에 경 읽기’인 것이다. 뚜뚜. 내 머릿속에 경고음이 들린다.
주의.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된다면 아홉 살들이 의욕을 잃어버릴 수 있음. 질문을 더 쉽게 바꾸거나 보충 설명이 필요함.
반대로 설명과 질문이 어렵지 않거나, 흥미로울수록 아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한껏 높이 손을 든다. 그 의욕의 파도가 나를 집어삼킬 것 같다. 반짝이는 눈빛 공격에 그만 누군가를 지목해야 하는 순간을 놓쳐 아이들의 팔을 아프게 만든 적도 여러 번 있음을 고백한다.
아홉 살들과 두 해 만나기 전, 이 학교에서 두 해 동안 열세 살들과 함께했다. 그들에겐 손을 들고 들지 않는 것에 더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오늘 기분이나 교사에 대한 감정, 수업에 대한 흥미, 학급의 분위기, 말하고 싶지 않은 영역 등등.
열세 살들을 위해 사용하고 개발했던 내 ‘레이더’는 아홉 살들과 만나는 데 별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예민해서 방해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의도를 파악하는 대신 아이들이 하는 말과 비언어적 표현을 보이는 대로 잘 포착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같은 우리말을 사용함에도, 그들의 모국어는 절대 같지 않다는 것!
다시 아홉 살들의 발표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들이 수업에 온몸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발표하고 싶게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으니, 이제 그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수업이 1대 다수가 아니라 마치 1대 1 상황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내가 당연히 자기를 지목할 거라고 거의 100퍼센트로 기대하고, 그렇지 않았을 때 너무 속상해 한다. 특히 꼭 발표하고 싶었던 주제일 땐 기대한 만큼 많이 실망하여 눈이 울망울망해진다. 무척 큰 목소리로 모두에게 잘 들리는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아, 나는 그냥 발표 안 할 거야.”
“치, 발표 안 해야지!”
“내가 제일 먼저 손들었는데!”
정말 하기 싫다기보다는 살짝 올라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여우와 신 포도’의 우화처럼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삐짐으로 달래고 있는 게 보였다. 딱하기도 하고 귀여워서 우습기도 하고. 나도 무지 억울한 듯이 아이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선생님도 정말 다 시키고 싶은데, 문제는 하나인데 20명이 손을 들었으니 어떻게 다 시켜줄 수가 있겠어. 아~ 정말 선생님도 다 시켜주고 싶었는데.”
눈썹을 팔(八)자로 하여 속상한 목소리로 말하니 선생님이 딱해 보여 마음을 풀어주는 마음 넉넉한 아이들도 있고, 그래도 여전히 삐졌어! 라는 몸짓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고루 즐거워야 하니까, 위와 같이 교사도 지명하기 난처한 상황을 만드는 것보다 웬만하면 다른 꾀를 쓴다.
짝끼리 편하게 이야기하는 짝 발표, 모두가 짧게 자기 의견을 모두 말하는 줄줄이 발표, 발표 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일어서서 발표하되 의견이 같으면 “빙고!” 외치고 앉는 빙고 발표. 또는 제비뽑기나 번호 순으로 답하도록 한다. 즉 아이들의 발표 기회를 늘리거나, 발표 기회가 오기까지 손을 애써 오래 들고 기다리지 않도록 무작위(또는 공정한 순서)로 뽑는다.
꼭 전체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 때는 아이들이 요새 모둠 활동, 모둠 발표에 재미를 느끼고 몸에도 익은 것 같아서 모둠 발표도 많이 쓰고 있다. 내가 생각한 아홉 살들의 모습보다 훨씬 진지하고 의미 있게 발표하는 아이들에게 놀랄 때도 많다.
#2. 선생님! 00이가 ~~ 했어요!
하루 동안 아홉 살들로부터 교사에게 들어오는 친구 행동에 대한 ‘민원’의 개수는 몇 개 정도일까?세어 본 적은 없고, 구성원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 같다. 우리 반의 경우 크고 작은 걸 다 합하면 50개는 너끈히 넘을 것 같다.
초임 교사일 때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정의로운 개입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로 행동과 해결에 나설 의무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 오해로 나와 아이들 모두가 피곤해졌다. 아이들 스스로 풀기 어려운 문제와 그렇지 않은 일을 ‘감별’해 내는 방법은,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아이가 선생님에게 억울함을 말하려고 다가오는 순간이 오히려 그 아이를 성장케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 아이가 감정을 스스로 처리하는 방법이나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는 방법을 거듭 익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민원’을 해결할 때 처음에 참 신기한 게 있었다. 아홉 살들에게 ‘미안해’ 한 마디가 지닌 힘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보기엔 별로 미안해 보이지 않는 투로 한 사과였는데 말이다. 유난히 몇 명만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이 다 그랬다.
눈물 콧물 줄줄 흘렸는데 미안해,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눈 녹듯이 풀리고 금방 좋다는 듯이 헤헤 웃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나만 혼자 심각한 상태로 남긴 채, 둘은 이미 방금 전의 속상함은 멀리 멀리 떠나보낸 표정이었다.
이미 같이 놀 마음의 준비가 끝난 둘을 내가 억지로 붙들고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는 모순적인 상황. 내 삶과 생각도 아홉 살들처럼 조금만 단순하고 가볍게 살고 싶어진다.
주의. 몇 분(또는 몇십 초...) 후 똑같은 상황으로 다시 내 앞에 올 확률이 높음. ‘마음 신호등’, ‘나 전달법’ 등등을 선생님에게 바로 이르기 전에 친구에게 써먹도록 잘 알려주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