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뚜벅이여행-2] 공책과 함께, 낯섦과 함께
#공책과 함께
여행에 가져갈 공책을 챙기면서 가장 마음이 뿌듯했던 것 같다. 메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 공책을 챙겨 혼자 다니다가, 생각나는 걸 그때마다 끄적끄적 적기로 했다. 쓰다 남은 공책을 활용하다보니 앞표지에 있는 캐릭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었다. 예전에 유럽에서 산 엽서를 하나 골라 마스킹 테이프로 임시로 붙였다. 조잡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썩 괜찮았다.
(나중에 다녀오고 나서 얼마나 썼는지 다시 보니 2박3일 동안 거의 공책 스무 장 가까이 끄적거림을 토해냈더라. 쓰고 싶은 생각이 많았나보다. 챙겨가길 참 잘했다.)
혼자 비행기를 타는 것도, 이륙하는 것도 처음이다. 설레던 것도 잠시, 막상 비행기 안에서는 피곤해서 정신없이 졸았다.
비몽사몽으로 제주도에 도착! 공항에서 나와 캐리어를 질질 끌고 버스를 타러 갔다. 렌트 대신 뚜벅이 여행을 하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양산을 쓰고 버스 타는 데까지 1km 이내로 오가는 정도라서 괜찮았다. 워낙 지도 앱이 잘 되어 있으니 버스 노선 검색도 실시간으로 할 수 있어 편하고!
예전에 친구랑 여름에 뚜벅이로 제주를 왔다가 호되게 당한 일이 있었다. '산책로니까 쉴 곳이 중간 중간 있겠거니' 하며 한담해안산책로(그때쯤 효리네 민박이 대세였다)를 한낮에 걷기로 했었다. 둘다 체력은 부실한데 해는 살을 다 구워버릴 것처럼 내리쬐고 문명의 이기는 우리 가는 길에 거짓말처럼 안 보이고... 하늘로 날 수도 없고 땅 속으로 갈 수도 없고....하마터면 탈수증세가 올 뻔했다. 이번 여행에는 그런 고행길(?)은 없도록 나를 배려해 아무 장소도 욕심내지 않고 그저 바다 앞에 숙소를 잡아 바다만 보고 오는 계획을 잡았다.
뚜벅이로 와서 좋은 점이 또 있었다. 버스 배차 시간이 길어서 한참 기다릴 때는 가져간 공책을 펴서 쓰고 싶은 대로 끄적였다. 여행 중간에 혼자 있다보니 어디 숨었다 나오는지 평소 못 만나던 생각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는데, 정리하는 시간이 종종 있으니 좋았다. 참, 버스를 타고 내리는 제주 할망, 하르방들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제주는 대구의 급행, 순환버스처럼 앞문만 있는 버스가 대부분이고 자리에 안전벨트가 있는 것도 신기했다.
#낯선 곳에서 나를 낯설게 보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혼자 다니게 되니, 새로운 상황에서 하는 내 사소한 행동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마치 유체이탈한 듯 스스로를 한 발짝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다. 나는 이럴 때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는구나,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당연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내 모습들이 조금 더 잘 보였다. 아마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그 사람과 맞춰서 행동하고 말을 주고받는 데 정신이 팔려 내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나보다.
▲식사를 바로 하러 가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공항 근처 카페를 검색해서 이동했다. 온통 뽀얗고 예쁘장한 카페에 손님이 없어 조용한 공간을 혼자 맘껏 누릴 수 있었다. 공책을 펴서 그때 적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행기에서 짐을 내리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내 키가 잘 안 닿는 걸 알고 도와주셨다. 호의가 감사해서 인사를 하는데, 내가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모습이 어딘가 불편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니 자연스럽게 감사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황송해하면서 온몸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듯 말하는 모습이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예의 바른 사람, 절대 일부러 피해 끼치지 않으며 도움을 받으면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굳이 연극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이번 여행을 오기 전에 내 중요한 ‘숙제’는 타인과 나 사이에 ‘적절한 경계선’을 찾고 그걸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그 숙제를 계속 생각하다보니 이 불편함을 포착할 수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경계선은 당신을 쫓아내지 않습니다. 내 경계선은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선명하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부드럽습니다.’
하는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애써 전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관대하다!
방학식 날 스스로와 약속하지 않았던가. ‘나에게 폭력적인 상황인 걸 알면서, 나를 모른 척 버려두지 않겠다’고... 그 약속을 잘 지키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경계선이 선명해도, 나는 충분히 괜찮다고. 겁내거나 변명할 필요 없다고. 그리고 아직 경계선을 세우는 게 조금 서툴러도 너무 서두를 필요 없다고. (자꾸 자꾸 얘기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나는 또 나를 다그치고 있을 테니.)
#제주, 첫끼는 각재기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멜국, 각재기국’을 하는 ‘앞뱅디식당’에 가보기로 했다. 각재기가 물고기라는 건 알았지만 자세히 찾아보지는 않고 도전부터 해 보기로!
버스 정류장에서는 생각보다는 많이 걸었다. 2인부터 국 주문이라고 되어 있어서 당황했지만 다행히 “원래는 안 되는데~” 하고 웃으면서 1인 주문을 받아주셨다. 운전 기사로 보이는, 팔뚝에 문신이 좀 있고 덩치 있으신 분들이 단체로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문신 때문에 좀 긴장했는데 다행히 얌전히(?) 식사만 하고 가셨다)
잠시 후, 뚝배기에 부글부글 거세게 끓는 국이 나왔다. 배추와 양념이 동동 떠 있었는데 생선살이 그 사이로 보였다. 생선 조각이 크다고 생각하고 앞접시에 건져내려는데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생선이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통째로 한 마리 국에 풍덩 들어있는 거였다. 약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통째로 건진 뒤 생선 살을 한 점 먹었는데.... 어머나, 하나도 안 비렸다. 고소하고 부드럽고, 국물도 개운하고 뜨끈뜨끈했다. 이게 제주의 맛이구나! 반찬으로 주신 얇고 긴 어린 배춧잎,맛난 쌈장이 인상적이었다. 푹푹 찍어 먹으니 여름이 입안에 느껴졌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협재 바다를 보러 나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