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뚜벅이 여행-3] 오답공책을 버릴 용기
B.G.M. 월정리블루스 ♪ - 제주스러운 앨범 :) 글에다 배경음악을 넣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연히 만난 음식들
달달한 디저트를 판다는 카페에 들른 다음, 검색해서 나온 ‘달리책방’에 가보기로 했다. 걷기엔 조금 멀었지만 바닷가 도로를 구경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카페에 도착해보니... 이 곳은 목요일마다 쉬는 곳이었다. 빵 사진을 보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허탈한 마음을 추스렸다.
▼ 내가 못 가본 카페 ㅠㅠ
평소에 여행을 하다보면,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지나가는 길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쁜 곳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멀리서 보면서 “저기도 다음번에 꼭 가보자!”라고 하지만 늘 지나치곤 했던 장소들을 다시 가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왜냐? 실망해서 책방으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예쁜 카페가 눈에 띈 것! 오늘은 ‘다음번’이 아니라, 지금 당장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의 날이 된 셈이었다.
‘JOJO coffee’는 소박하지만 우아한 분위기(클래식 음악도 흘러나왔다)가 느껴지는 카페였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시는 듯했다.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써 놓은 곳답게, 커피에 꽂혀 나온 빨대는 금속 재질이었다. 환경을 사랑하는 운영 방침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게다가 포실포실하고 입에서 사르륵 녹는 당근 호두케이크도 마음에 들었다.
▲ 호두케이크가 사진에는 작게 나왔지만 무척 배부를 양이다.
카페지기께 한식으로 저녁을 먹을 만한 곳을 여쭈니 ‘대문집’에서 미역국이나 애호박찌개가 괜찮다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우연히 먹어본 애호박찌개!원래 해물뚝배기가 전문인 곳이다보니 애호박찌개는 ‘아주 맛있다’까진 아니었지만 ‘한번쯤 먹어볼만한’ 맛이었다. 이렇게 끓이는 찌개를 육지(?)에서 잘 먹어볼 일이 없기도 하고 애호박 하나를 거의 통째로 썰었는지 찌개에 듬뿍 넣은 점이 특이했다. 새우젓과 돼지고기로 맛을 낸 듯했다.
#달리책방, 인생책방을 만나다
책방 이야기를 빠뜨린 채 저녁밥 이야기를 먼저 써 버렸다. 두 명의 책방지기가 꾸리는 달리책방. 두 분 모두 중년의 여성분이셨고 어딘가 작가스런(?) 분위기가 풍겼다. 책방지기들이 책을 정말 사랑하는, ‘책 덕후’인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헌 책(이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책들로 보였다)에 꼼꼼히 밑줄이 그어져 있고, 책마다 정성들여 쓴 귀여운 소개 쪽지가 붙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애정이 듬뿍 담긴 책 소개 쪽지들이 구매 욕구를 마구 자극했다.
책방 안은 짐작한 것보다 넓고 책장은 각양각색의 책을 품고 있었다. 꼭 마법으로 숨겨두었던 공간에 갑자기 들어온 것처럼 다른 공기가 흘렀다. 새 책을 구입할 수도 있지만, 음료를 주문해서 한쪽에 마련된 좌석에서 헌 책을 마음껏 읽을 수도 있다. 딱 집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래 머물기에 마음이 편하도록 배려해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서관과 책방 사이의 어디쯤일까, 그래서 더 좋은 공간이었다. 책을 마음껏 만나고 즐기다 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사고 싶은 책이 잔뜩 있었지만 헌책 중에는 판매용 책이 없는 것이 많아서 아쉬웠다. 다행히 새 책도 탐나는 것이 많았다. ‘할망은 희망’이라는 책을 샀다. 제주 할망들을 5년 동안 인터뷰한 ‘라이프 스토리’ 전문 정신지 작가의 기록이다. 인터뷰를 그대로 적은 부분이 많아서 제주 방언과 해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람 냄새나고 너무나 따뜻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할망의 집에 초대받아서 굽이굽이 펼쳐 놓으시는 이야기를 함께 듣는 기분이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르포나 인터뷰에 관심이 많고 나도 한번쯤 해보고 싶던 일이라 부러워지기도 했다.
혼자 뚜벅거리며 다니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카페와 숙소에서 끄적끄적 휘갈겨 적었다.
#반드시 참인 명제
여행을 오기 전, [홀로, 뚜벅이 여행]의 첫 글에 썼듯이, 한 학기도 끝나고 내 마음도 산산조각난 채 내 방에 틀어박혀 있던 날이었다. 힘들 때면 고민을 터놓는 오랜 친구에게 징징대는 말투로 카톡을 보냈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잘 못 믿겠다고. 세상살이를 ‘제대로,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그때 대화 중에 친구가 고맙게도 이런 말을 해 주었던 것이 강렬하게 남았다.
“반드시 참인 명제는
1. 너는 잘못되지 않는다.
2. 너는 삶을 잘 살고 있다.”
친구는 내가 이미 잘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마치 본인이 잘하는 특기는 영어인데 체육을 잘하는 친구, 과학을 잘하는 친구를 골라 부러워하며 스스로에게 모자라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친구의 말대로 나는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기 어려워한다. 마치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며 오답공책을 쓰던 버릇대로, 삶에서 늘 오답공책을 들고 있는 것 같다. 틀린 게 있으면 그 원인을 낱낱이 분석하는 행동이 내 실력을 올려 줄 거라고 믿던 버릇처럼, 나는 삶의 많은 순간에 나를 부끄러워하며 오답으로 여기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어떨 때는 그 버릇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할 때만 나와야 하는 버릇이, 끄지 않은 엔진처럼 계속 작동해서 방전이 되고 말았다.
내 앞에 놓인 삶이 별 의미 없이 지나갈까봐, 그래서 후회만 남을까봐 자주 두려워한다. 나는 어쩌면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조금이라도 더 가치롭고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막상 내 행동력은 생각에 비하면 창피할 정도로 부족하다. 그래서 자꾸 괴롭다. 내가 늘 기준에 못 미치고, 부끄럽다. 그래서 자꾸 나 자신에게 독촉하며 숙제를 내고 또 내 준다. 그리고 숙제를 다 해내지 못했다며 늘 마음 한 구석에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또, 나는 왜 이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않냐고 스스로 원망했다. 고민하다가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 버리는 나로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 확신이 뚜렷한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들은 나만큼 힘들게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본인이 발견한 이상에 따라 확신을 가지고 사는 분야에서 최상위권(표현이 좀 뭐하지만 어떻게 정리가 안되어 이렇게 표현한다)인 언니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서 놀랐다.
“너는 확신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구나. 확신에 찬 사람이 힘들지 않은 게 아니야. 그들도 당연히 고통을 겪고 고민을 해. 다만 당장 좋은 결과가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믿기에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거야. 그러다보면 또 스스로 택한 삶의 방식에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 와. 그렇게 조금씩,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단단해지는 거야.”
어쩌면 당연히 모든 일에는 고민과 두려움과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나는 당연한 일들마저 겁을 먹고 자꾸 특별히 내가 문제여서 그런 것처럼, 오답으로, 부작용으로 분류했다는 걸 깨닫는다.
자책하는 내게 언니가 덧붙인 말,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이상을 다 이루지 못할지라도 추구한 자체로 애쓴 거야. 너는 애쓴 것에 대해 격려 받고 시행착오를 겪을 권리가 있어. 그리고 늘 네가 생각해야 할 최우선 순위는 네 존재야.”
격려 받고 시행착오를 겪을 권리라. 그렇게 스스로 나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내 존재를 최우선순위로 여길 수 있을까.
용기를 가지고 아이들 앞에서도 두려움을 걷어내고 편안하게, 비갠 뒤 하늘처럼, 그렇게 서 있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사족, 다 못한 이야기. 첫날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첫날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제주기역’. 첫눈에 반해 버렸다. 나를 맞이하는 첫 풍경이 너무 그림 같아서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던 1층 카페가 좋았다. 늘 개방하는 곳은 아니고 조식 먹을 때만 연다는데 방 청소하는 시간 동안 열어두셔서 잠시 쉬면서 그림책 구경도 하고, 휴대폰 충전도 할 수 있었다.
숙소 바로 앞 바다는 파래 냄새가 물씬 나고 물고기들이 피융 피융 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것도 보였다. 어머니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익숙한 솜씨로 조개 같은 걸 잔뜩 잡고 있었다. 빛깔 고운 바다 위로 비양도가 코앞에 보였다. 비현실적이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화장실과 샤워실이 따로 있지 않고 보통 가정집을 이용한 형식이다보니 도미토리 6명끼리 서로 차례를 기다려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각 침대에 개인 조명이 없었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거실 테이블에서 하고 나서 잠들었기 때문에 큰 불편은 느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