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배우다] 뉴욕, 센트럴 파크를 걷다
손선생
4
1926
6
2019.11.21 20:30
A장소에서 B장소로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동한다. 걷기도 하고 버스나 전철을 타기도 하고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로, 아주 먼 거리는 비행기로 이동한다. 이 모든 방법은 크게 걷기와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에는 (A와 B 사이의 경험은 건너뛰고) 순간이동을 하지만, 걷기는 우리에게 ‘사이의 이야기’를 붙잡을 수 있게 한다. 걷기는 자신의 감각에 대한 예민성을 허락하고 걷는 과정 속에서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준다. 또한, 걷다가 만나는 인연들을 통해 특정 장소를 그들의 렌즈까지 장착하여 살필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누구와 함께 걸을 때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의 보폭에 맞춰 걷는 게 중요한데 서로의 다름을 발견하고 맞추어갈 수 있는 여유와 배려도 가르쳐준다. 살면서 새록새록 이런 걷기를 통한 관계 맺기와 그 관계를 통한 배움의 경험이 하나씩 늘어난다. 2019년 여름방학은 방학 첫날과 개학 전날만 빼고 미국에서 보냈다. 뉴욕에서의 3일 중 센트럴 파크를 한나절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배우고 경험한 이야기도 이 중 하나이다.
센트럴 파크로 길을 나서다.
숙소인 하이 호스텔(103 St.)에서 맨해튼을 위아래로 넓게 차지하고 있는 센트럴 파크의 북쪽 지점은 몇 블록 만 걸어가면 다다를 수 있는 거리였다. 숙소에서 주는 아침으로 베이글과 사과 한 알을 먹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호스텔 건물을 끼고 돌아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보니 작은 공원도 보이고 놀이터도 보였다. 그 길에는 몇 개의 벤치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멀리서 분홍색 바지가 유독 눈에 띄는 중년여성이 보였다. 동네 주민이신가 여쭸더니 이 동네엔 일하러 왔다고 하셨다. 사실, 일터에 가기 전에 이 벤치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오전에 잠깐 오가는 시원한 바람 맞는 게 일상이라고 하셨다. 순간, 내 머리를 시원하게 지나가는 생각 한 자락!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 또는 수업 시작 전에 하는 나만의 의식은 무엇일까? 24명의 아이들을 오롯이 맞이하기 위해 나만의 스타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있나? 이런 일은 가르치고 배우는 직업을 가진 내게 왜 필요할까? 나도 나만의 하루 시작 의례를 만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뉴욕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곳이 센트럴 파크에 있다.
일터로 가기 위한 의식의 장면을 뒤로 하고 센트럴 파크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난 분은 내게 뉴욕에서 자연이 가장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곳을 소개해 주셨다. 카메라로 여기 저기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발견하시고는 “I will show what you’d love to see. (네가 좋아할만한 곳을 보여주겠다.)”하시며 앞장을 서셨다. 그 분을 따라 아치형의 터널을 통과하니 나무가 한층 더 우거진 곳이 나왔다. 소개만 해주시고 치과 예약이 있다 하시며 쿨하게 가버리시는 뒷모습에 고마움을 전하며 녹음이 우거진 곳을 빨려 들어가듯 들어갔다.
“툭. 투둑. 투두둑.”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도토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고 나만 덩그러니 길 위에 서 있으니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내 청각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잠시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투둑, 툭, 툭툭” 하는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감상하였다. 그 사이 한 할머니가 지나가신다. 걷는 중에 두 번이나 마주친 할머니, 영어는 못하시는 것 같은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편다. 미국에 정착한 자녀를 따라온 할머니, 아직 영어는 서툴고 자식들 직장 간 틈에 공원을 천천히 몇 바퀴 걸으며 시간을 보내시는 것 같다. 영어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공원이 주는 편안함은 고향을 부르고 게다가 핸드폰으로 들리는 중국노래는 큰 위로가 되는 그런 시간을 즐기고 계시는 중?
공원 지도를 다시 만드는(re-mapping) 인턴들을 만나다.
한 그룹의 청년들이 어떤 장비와 아이패드를 두 손으로 들고 나를 지나쳐갔다. 궁금한 건 못 참으니 명찰을 달고 있는 한 청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What are you doing now?”
센트럴 파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중인데 새로운 산책길(트레일)을 맵핑(mapping)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미 만들어진 길도, 걷는 코스도 많이 안내되어 있고 안내판도 여기저기 많지만 또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이 신선했다. 있는 길은 다시 밟아보며 방문객들의 안전을 위해 정비하고, 새로운 길도 만드는 작업을 하는 인턴들의 배움과 경험이 참 소중해 보였다. 그들의 뒤를 따르며 개 두 마리와 산책을 하는 여자 분을 만났는데 이 구역이 좀 오래된 곳이라며 원을 그리듯 작은 연못을 따라 한 바퀴 돌면 참 좋다고 하셨다.
새를 관찰하는 은퇴한 부부도 만났다.
이 분들은 날마다 공원으로 출근을 하신단다. 망원경을 하나씩 목에 걸고 같은 지점에서 늘 같은 시간에 새들을 관찰한다고 한다. 새 전문가냐 물으니 아마추어이고 새는 은퇴하고 취미로 관찰하러 다니면서 책 찾아보며 공부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홍콩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지 40년이 넘었다는 정보도 덧붙이셨다. 나와 이야기 하는 중에도 눈은 계속 새들을 쫒고 계셨다. 두 사람은 서로 먼저 발견한 새를 알려주며 오늘 특별히 보러 나온 새가 나타나자 옆에 있는 나와의 대화는 급히 끊고 망원경 렌즈로 그 새를 관찰하며 이야기를 부부끼리 나누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은퇴하면 어떤 일을 할까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나 내게 질문해 보았다. 인생의 반을 살았으니 이제 슬슬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지도를 건네 준 센트럴 파크인은 친절했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센트럴 파크의 원시림(?)을 한 바퀴 돌고 나와 커다란 평지로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알고 싶어 지도가 필요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 가까운 건물 어디에서 지도를 찾을 수 없을까 했는데 공원관리원의 차를 발견하여 어디에서 지도를 얻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가 갖고 있는 지도를 주겠다 하여 따라갔다. 이전 버전과 요즘 버전의 두 가지 지도를 얻었다. 고마움을 기억하고 싶어 사진 한 장을 청했더니 흔쾌히 찍혀 주었다. 공원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와 비교될 수도 있겠다. 이미 그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초행길인 사람들을 도와줄 때, 그들의 필요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울타리를 담당하는 센트럴 파크인은 든든했다.
지도를 얻고 당당한 마음으로 야구장 쪽을 따라 걷다가 울타리 정비 작업을 하는 공원 직원을 발견하였다. 그 옆에는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물어보니 그 사람도 인턴이라고 하였다. 공원에서의 역할이 주변 시설물 수리하고 안전 관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3년 후엔 은퇴를 하신다고 하셔 은퇴 후 하고 싶으신 일이 무언가 여쭸더니, 좋아하는 무술연마와 기타연주를 꾸준히 하고 싶다고 하셨다. 은퇴를 몇 년 앞둔 사람들에게 은퇴 후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 질문을 하면 누구나 무얼 하고 싶다고 척척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건 일하는 동안 꾸준히 해온 취미가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주는 것일 것이다.
쓰레기 줍는 자원봉사자의 작업은 숭고했다.
한낮이 되니 햇살이 뜨거워졌다. 물 한 모금 마시며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내 몸을 정지된 채로 두고 주변을 살피니 또 다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초록색 자원봉사자라고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입고 집게로 뭔가를 줍고 계신 분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셔 그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존재감을 전연 느끼지 못할 정도로 차분히 자신이 할 일을 하고 계셨다. 이 넓은 공원이 수많은 여행객과 뉴욕시민을 위한 쾌적한 휴식처로 유지될 수 있는 숨은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분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센트럴 파크의 여정은 끝이 났다. 공원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두루 만나면서 그 공원의 진가를 좀 더 세심하게 살필 수 있었다. 수년 전 친구와 센트럴 파크를 자전거 릭샤를 타고 한 바퀴 돌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을 하였다. 그 때는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눈으로 공원을 경험했다면 이번에는 내 발이 가는대로 공원을 누비며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고 내가 쉬고 싶을 때 쉬고 걷고 싶을 때 걸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지도가 보여주는 장소의 위치, 누군가의 안내에 의해 경험하는 장소의 내용과 내가 그 장소를 걸으면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다른 층위의 경험이다.
걸으면서 배우는 과정은 오늘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