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에서 낡아가고 싶습니다
취기가 걷힌 시선으로 조심스레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주 몸집이 작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실루엣이 있었다.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보니,
그 실루엣은 부부로 보이는 노인 둘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손에는 작은 빵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두 분은 그걸 나눠 드시고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빵을 한 꼬집 뜯어 할머니에게 건네면,
할머니는 그것을 받아 또 느릿느릿하게 드시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그런 느린 템포로 빵을 나눠 먹으며,
계속해서 저 높은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그 허공에 뭐가 있는지가 궁금해져,
그 방향의 허공으로 고개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엔 보름달도 반달도 아닌,
어중간한 모양의 달이 떠 있었다.
- 오휘명, 당신이 그 끌림의 주인이었습니다 中 -
삶을 살아가다 보면 각 사람에게는 수많은 끌림들이 발생합니다.
그 끌림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떠한 일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쁘게 눈 앞에 놓여진 삶을 살다 보면
그 수많은 끌림들에 전부 반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 언젠가 제가 예전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시절,
저보다 서른 살 정도 많으신 동네 어른 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 책을 안읽는 것 같아”
그 때, 저는 현실을 너무 모르신다는 듯한
아주 약간은 날이 선 이런 대답을 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책을 안읽는 것이 아니라,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학과 공부만 해도 일주일에 밤을 여러 번 세어야 할 정도로 바쁜데,
학과 공부만 해서는 아무 곳에도 취업이 되지를 않습니다.
학과 공부는 물론,
영어 공부에, 자격증 공부에, 각종 프로그램 툴 공부에
저는 지금 고3때 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열심히 살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취업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대학생들이 책을 읽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을까요?”
그 당시 저는 학기 중에 거의 모든 날을
아침 9시에 학교에 도착해서 밤 11시 넘어서까지 공부를 하고 왔었기 때문에
이러한 저의 생각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10살 정도 더 먹고,
지금에 와서 그 어른 분의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분이 대학생들의 바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책 속에 담겨 있는 젊은 시절에는 '직접 다 겪어볼 수 없는 경험과 끌림들’을
우리나라의 수많은 대학생들이 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지금 그러한 상황이 저에게 펼쳐진다면
그 의미를 한 번쯤은 더 생각해보고,
그 때처럼 날이 선 듯한 그런 대답은 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그 때 책 속의 간접적인 끌림들을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갔을 뿐
제 마음 속에서 이끄는 끌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잘 몰랐었나 봅니다.
보통의 선생님들보다는
훨씬 늦은 나이에 그 강한 끌림의 소리를 듣고
이 곳에 오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덕분인지 다행스럽게도
이제 저는 제 일상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끌림의 의미들을
조금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그 수많은 끌림의 소리들을
들으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방황치 말고
제가 사랑하는 일 옆에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옆에서
그렇게 낡아가고 싶습니다.
매해 시간은 저의 겉껍데기를 조금씩 변하게 하겠지만
속알맹이만은 변하지 않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당신 곁에서 조금씩 낡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