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비추다] 나를 좋은 교사라 착각하는 제자 L (2편)
반 분위기를 겨우 수습한 11월 초, 내가 없던 이 교실에서 학습이 이뤄진 것은 거의 없었다. 교과서 진도를 보아하니 1~2단원 차이로 진도가 늦어졌고, 곧 다음달에 있을 학예회 준비와 겹치게 되면서 진도를 나갈 시간은 더욱 촉박해졌다. 다행히도 -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만난 아이들의 두뇌가 꽤 명석했던 것 같다. 당시엔 중간/기말고사를 모두 쳤었고, 암암리에 아이들 사이에서 틀린 개수를 비교하며 석차까지 내던 분위기였는데, 11개 반 중 우리반 아이 3-4명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밀려있던 진도를 겨우 맞추었다. 어떤 선생님도 해내지 못한 진도를 폭풍처럼 나아가는 나를 보며 '반장이었던' 그 학생은 '우와-'라는 말만 계속 내뱉었다.
순조롭게 진도를 나갔고, 학예회도 무사히 잘 마쳤다. 어느새 졸업식이 왔고 - 여학생들 사이의 교우관계에 해묵은 갈등을 뒤로 한 채 겨우겨우 졸업시켰다. 자존심이 세고 주장이 강하던 전학생과, 분위기를 주도하던 몇몇 여학생들 사이에서 갈등이었는데, 이 아이들을 화해시키고자 저녁 6시에 교실로 불러 모으고 학교 근처에 분식집을 갔다. 마침 비가 내렸고, 밤 늦게 애를 불렀던 지라 애들과 함께 학교 인근을 걸으며 하나둘씩 집으로 데려다 준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나의 노력은 정말 순진했던 것인데, 결국 갈등이 있던 그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자 말자 다투기 시작하여 중학교를 졸업하는 3년 내내 원수처럼 지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해마다 거르지 않고, 분기 또는 학기마다 나를 찾아온, ㄴ 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반장에게서 들었다.
반장에게서 들은 당시의 뒷 이야기는 참 다양했다. 당시 나를 두고 학부모들이 나눴던 이야기와 아이들 사이에서 돌았던 소문, 교실분위기를 제대로 잡지 못해 괴로웠다는 아이의 반응이 있었다. 선생님께 성희롱 수준으로 장난을 치려던 아이들의 문제, 지금 중학교에서도 그 버릇 고치지 못한다는 이야기, 모 선생님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 등... 사소했던 옛 추억부터 지금 겪고 있는 여러 문제까지, 다양한 고민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같지 않아 늘 귀담아 들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엔 스스로 반성했다. 특히 반장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했는데, 어떻게 선생님이란 사람이 '그럴 수 있냐'는 식의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그 이야기 중 이 곳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의고사와 내신으로 표현되는 '점수' 문제 뿐인 듯 하다.
L의 말을 들어보면 점수로 학생을 비교하고 차별하는 교사의 언어가 여전히 심각하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어쩜 그럴 수 있느냐'며 "선생님이 우리 중학교(고등학교)로 올라오시면 안 돼요?"라는 말은 나를 참 기분좋게 만들다가도 동시에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아이가 비판했던 선생님의 모습은 내가 학창시절에 보고 경험했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교사가 된 지금도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내부 조직 문화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나를 매우 '인격적'인 교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도 어쩌면 점수로 아이를 판단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L이 나를 자주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점수가 높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지난 1학기에 고3이 된 L은 스승의 날을 맞이해 긴 장문의 편지를 써서 내게 보냈다. 편지에는 '선생님 같은 분을 본 적이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기가 만난 선생님은 하나같이 초등학교부터 성적을 강조해 왔으며, 끊임없는 시험 속에 친구와 나를 비교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L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는데도 말이다. 성적만 강조하는 선생님들 덕분에 아이들한테 시샘을 받는 것 같고, 눈치가 보이며, 친구 관계도 소원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
지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 중 단 한 가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배움'을 선택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배움은, 이 사회와 기득권이 마련해 놓은 통제 수단이자 모든 학생에게 공정한 과정을 제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삶을 가꾸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움을 게을리하는 학생들을 보면 진심으로 걱정이 되고, 때론 화가 나기도 한다.
화를 참지 못하고 선을 넘는 순간, 나 또한 L이 비판했던 수많은 선생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맴돈다. 나를 오해하고 있는 이 L에게 나는 끝까지 좋은 선생님으로 남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모든 교사가 그렇겠지만 -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을 개인적인 철학으로 표현하거나, 공적인 제도로 관철시키려는 순간에는 교사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판을 받는 것은 괜찮은데, 실망을 안기는 것은 나 스스로 괜찮지가 않다.
L은 여러모로, 내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학생이다. 나는 벌써부터 L 앞에 고백할 나의 모습이 부끄럽고, 이를 받아들일 L의 표정과 생각이 두렵다. 존경하던 선생님을 해마다 찾아갔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찾아갈 때마다 조금씩 실망감이 커져 이후로는 그들을 찾게 되지 않는 나를 떠올린다. L이 나를 찾아오는 날도 이젠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