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겨진 기분] - ep14 행운의 상자
학교에는 사회적 배려대상자가 있다.
기초수급대상자라고도 한다.
학교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주로 학급당 기본적으로 둘셋 이상은 있다.
딱 봐도 티가 나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서류가 아니고서는 가늠도 못할 것 같은 학생도 있다.
물론 대상자가 누구며 어떤 지원을 받는가에 대해서는 엄격한 대외비로 보호된다.
사회적 배려대상자 선정은 대부분 전산으로 이뤄진다.
지역의 주민센터에서 가정의 소득과 관련된 자료가 넘어온다.
한 부모 가정이나 조손가정에 관한 사항도 넘어온다.
상황에 따라 담임이 파악하고 학교장 추천으로 지원이 이뤄지기도 한다.
물론 그중에서 서류와는 다르게 부유한 가정도 종종 발견하기도 한다.
올해도 6학년을 맡게 되었다.
졸업을 앞둔 시기 날씨가 쌀쌀해질 때면 어김없이 장학금 관련 문의가 들어온다.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으니 아이들을 선정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학교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서류상 대상자가 아니더라도 어려운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관련 업무 교사들이 모여 비밀리에 지원 대상자를 선정한다.
기부자의 요청과 공문의 조건에 따라 나름의 기준을 만들고 그에 따라 공정하게 학생을 선발한다.
올해는 우리 반 아이가 선정되었다.
부모님과 연락을 하여 소식을 알렸고 장학금을 보냈다.
그리고 그냥 말았어야 했는데 아이에게 묻고 말았다.
“엄마가 무슨 말씀 없으셔?”
금 모으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IMF인지 REF인지도 모를 때 그 것은 우리를 찾아왔고 내 주변 어른들은 모두 ‘힘들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말은 우리 집도 물론 피해 가지 않았다.
티브이 속에는 모 연예인이 금을 기부했다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마치 금을 기부하지 않는 사람을 나쁜 사람인 양 누가 얼마나 내놓았는지를 줄줄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집은 나쁜 사람들만 모여있었다.
기부할 금이 있지도 않았고 있더라도 기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 집이 어떤 상황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매일 같이 다투시는 부모님에게 쉽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살던 집이 점차 줄어들고 엄마가 일을 나서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조금 어렵구나라고 느끼곤 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모아두었던 나와 형의 세뱃돈 통장의 잔액이 0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심각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에 정확히 어떤 위기에 놓여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부모님께 여쭙지 못했다.
참으로 외로운 시기였다.
아버지는 아침에는 늘 주무시고 계셨고 하교하고 나면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으셨다.
어머니 역시 나를 깨워주시고는 먼저 출근을 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홀로 텅 빈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을 기다리곤 했다.
집이 좁아 횡하진 않았다.
형도 있었다.
그 시절에도 형은 공부를 잘했는지 나름 이름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내 기숙사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토요일 하루 집에서 자고는 일요일이면 다시 기숙사로 향했다.
대부분의 시간이 혼자였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종례시간이 되고 담임 선생님께서 김을 한 박스 내어 주셨다.
나는 큰 행운에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왜요?”라는 나의 물음에 선생님은 별말씀 안 하셨다.
혼자서 밥을 챙겨 먹는 내게 김 한 박스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부러워하며 조금만 달라고 했지만 절대 주지 않았다.
그대로 꽁꽁 싸매어 집으로 들고 갔고 자랑처럼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어머니 역시 별말씀 안 하셨다.
행운은 계속되었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당첨은 나의 것이었다.
처음에는 공짜 김을 먹는 생각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선생님이 나만 이뻐해 주시는 '편애'받는 기분이었다.
김 상자를 받을 때마다 '내가 뭘 잘했지?', '왜 나를 이뻐해 주시는 걸까?' 혼자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행복 회로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에 의심을 갖기 시작했고 내 시선은 늘 나와 같은 선물을 받은 A라는 친구에게 향했다.
A는 우리 반 공식 은따였다.
늘 엉클어진 머리와 냄새나는 교복을 입고 다녔다.
자신 없는 말투와 어리숙한 행동에 우리 반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어떤 아이도 그가 어렵게 생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외롭게 지내던 나조차도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이 감상자의 의미를 깨달았다.
“착하고 이쁜 학생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가난한 학생에게 주는 구호품”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선생님이 나를 특별히 이뻐해 줄 리도,
나에게 큰 행운이 계속될 리도 없었다.
그날 나는 선생님이란 존재에게 처음 반항을 해보았다.
받은 감상자를 교실에 두고는 다음 날 점심시간에 꺼내었다.
나는 도시락 반찬 삼아 먹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다 나눠줬다.
남은 것은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그 소식을 담임 선생님이 몰랐을리가 없었다.
화가 난 선생님은 종례시간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예의가 없다니 은혜를 모른다니하는 매운 소리를 들으며 난 마음속으로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내가 언제 달라고 했어요!?”
이 일이 있고 내게 더 이상 행운의 상자는 없었다.
아마 선생님에 대한 괘씸죄이었을지 모른다.
내게 준 특별한 호의를 그런 식으로 버려버렸으니 말이다.
선생님과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평소에 서로 친하지 않았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김 따위 없어도 밥만 잘 먹었다.
내가 한 일에 후회는 없었다.
그 날 일은 아이들에게도 쉽게 잊혀 갔다.
결국 나에게도 교실에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었다.
하지만 A는 계속 감상자를 받았다.
그 해가 마무리되었다.
새해가 밝았어도 우리 집의 형편은 눈에 띄게 좋아지지도 더 이상 나빠지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버텨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나는 3학년이 되었다.
새 학년 담임선생님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너 공짜로 컴퓨터 배워볼래? 특별히 너한테 물어보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컴퓨터도 없는 집에서 컴퓨터를 배우라니 나는 신이 나 흔쾌히 대답했다.
그 날 컴퓨터학원에 가서야 다시 깨달았다.
컴퓨터 학원은 내게 또 다른 행운의 상자였다.
두번 째 행운의 상자는 정말 행운이었다.
이 때 배우게 된 컴퓨터는 내게 큰 의미였다.
집에 돌아와 책으로 다시 공부해서 자격증을 땄다.
지금은 의미가 약해졌지만 당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은 큰 의미였다.
그 때 배운 나모웹에디터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는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피씨방에서 워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즐길 때 나는 옆에서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그렇게 배운 컴퓨터와 홈페이지제작은 아마 요즘 유행하는 메이커교육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만들 수 있다는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감명때문인 걸까 약아빠지게도 그날의 아픔은 잊어버렸나보다.
이제와서는 '모든 기회는 소중하다'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내가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때 그 행운의 상자를 내가 받아서 내가 성장했으니까 너희도 그래야해 라는 꼰대같은 말을 서슴없이 하고는 한다.
뭐든지 이겨낼 수 있다라는 마음을 용기라는 단어로 포장을 해서 이야기해준다.
정작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이겨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난이라는 것은 절대 아이들의 죄가 아니다.
그렇다고 부모들에게 그 책임을 모두 떠넘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난이란 프레임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씌워질 수 밖에 없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다른 아이들은 기가막히게 눈치를 차려버린다.
그 때부터 아이에게는 가난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려버린다.
한 번 달린 해시태그는 삭제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