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겨진 기분] - ep11.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학기 초면 학급별로 가정 실태조사를 한다.
요즘에는 인권문제로 인하여 예전만큼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심지어 개별 답변도 개인의 선택에 맡기기도 한다.
의 학창시절과 비교했을 때 질문 수준도 단순하고 질문의 양도 많이 줄었다.
딱히 어디에 보고하거나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는다.
그럴 거면 무엇 하려 하냐지만 이것은 담임 교사에게 꼭 필요한 자료이다.
함께 할 일 년이라는 세월 동안 천천히 알아가도 좋을 일일지라도 행여 그 사이에 오고 갈 상처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빠진다.
스무 명이 넘는 학생의 개별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아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많다.
올해도 아이들 손에 설문지를 보냈다.
말로는 "적고 싶은 것만 적어도 돼”라며 무심한 듯 안심시켰지만 마음 속으로는 꼼꼼하고 자세하게 적어오기를 바랐다.
아이들 입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일들이겠지만 나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가 말하기 싫을 경우에도 말이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교육적인 의미였다.
가정통신문의 수합이 완료가 되고 나는 교실에 홀로 남아 자료를 천천히 읽어본다.
나는 설문지에 적힌 내용을 보고 많은 것을 분석해 본다.
부모와의 관계, 학교에 대한 관심도, 생활 수준, 형제 관계등을 종합해본다.
찜찜하지만 예민한 개인 정보를 학급 운영을 위해 존재해야 할 '필요악'이라 여겨본다.
돈방석이 유행했다.
돈 팬티도 유행했다.
모두가 돈이 많아서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상황은 그 반대였다.
그 놈의 IMF 시대가 찾아왔다.
난 당시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 지도 뭐가 힘든지도 몰랐다.
그냥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내 주변은 이미 처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곳곳에 일자리를 잃은 부모들이 생겨났다.
티브이에서는 힘을 내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 집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큰 꿈을 품고 지방으로 내려온 아버지도 IMF라는 큰 파도에 휩쓸리셨다.
분명히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빠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늘 바쁘셨기에 난 조금이라도 함께 더 있고 싶어 했다.
주말에 피곤에 쩔어 늦잠을 자는 아빠가 야속해서 억지로 깨우기도 했다.
어쩌다 집에 일찍 오시기라도 하면 그렇게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운동장에서 아버지와 야구공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그 어떤 여행보다도 좋았다.
그랬던 아버지가 이젠 집에만 있으신다.
우리 집은 급격히 힘들어졌다.
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어머니와 다툼 속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짐작만 할 뿐이다.
아버지가 계획했던 일은 실패하고 남은 돈은 주식으로 사라졌다.
그 사이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고 아버지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우린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날도 무엇이 그렇게 피곤하신지 누워만 계신 아버지와 일찍 일터로 나간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끼며 등교를 했다.
드디어 새 학년이 되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담임선생님에게서 드디어 벗어났다.
새로운 선생님은 좀 무섭긴 했지만 나는 그편이 더 좋았다.
만나고 싶지 않던 하이에나 같은 친구들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새로운 선생님과 새로운 친구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작년에 반장을 했다는 이유로 또 다시 학급임원을 하게 되었다.
매일 한 번 이상 교무실을 들락거리게 되었고 덕분에 선생님들이 많이 기억해주는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학년 초 가정실태조사를 한다.
요즘은 예민한 정보는 억지로 묻지도 않는다.
가정통신문을 통해 선생님과 본인만 공유하는 비밀이야기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내 담임선생님은 공개적으로 조사를 하였다.
통계를 쉽게 매 질문 손을 들었다.
집안 월소득, 부모 학력, 부모 직업 등 마음만 먹으면 서로를 속사정을 깊게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모든 거수 통계가 그렇듯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선생님의 손가락이 숫자를 더해가며 내게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질문은 “아버지가 무직이다 손들어” 이었다.
너무 창피했다.
선생님께 거짓말하는 것이 두려워 솔직하게 손을 들었다.
무거운 쇳덩이가 달려 있는 듯 잘 올라가진 않았지만 어쩔 수없었다.
그 질문에 나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손을 들었던 것 같다.
난 눈앞이 깜깜해서 누군지 쳐다볼 수 없었다.
내가 다른 곳을 보면 나를 보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여전히 누워만 계셨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처음 묻는 내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냥 회사 다닌다고 해, 아니다 어디서 선생님 한다고 해”
다음 날은 개인상담있었다.
개인상담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선생님은 교실 앞자리 교사용 책상에 앉아 계셨다.
그 옆으로 우리는 이름 순으로 배정받은 번호대로 줄을 섰다.
모두들 기다리는 것이 지겨웠다.
종종 장난을 치다 꾸중 듣기도 하고 잡담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내게 선생님의 상담 질문은 선명하게 들었다.
질문은 간단했고 반복됐다.
“아버지 뭐 하시노?” 많은 이들에게는 유명한 영화 속 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명대사지만 내게는 현실이었다.
이 후 영화가 개봉되고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내 내 차례가 되었다.
선생님의 형식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학교생활 불편한 거 있는지,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는지를 물어보셨다.
물론 그런 게 있었어도 뒤에서 아이들이 다 지켜보는 상황에서 솔직히 말할 리가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에서도 나는 온통 다음 질문에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결국 올 것이 왔다.
“느그 아버지는 뭐 하시노?”
심지어 어제 분명히 가정실태조사를 할때 '아버지무직'이라고 손 들었는데 기억을 못 하셨나 보다.
예상했음에도 나는 당황했다.
누가 들을까 더듬거리며 얼버무렸다.
“그냥 뭐... 선... 선생님.. 일 하셔요”
나 분명 선생님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연세 많으신 선생님 귀에는 ‘선생질’로 들리셨나 보다.
상담이 시작되고 줄곧 앉아 계시던 선생님이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은 상담지를 넘긴다고 침을 바르던 두 손가락으로 내 귓불을 잡았다.
화가 난 선생님 입에서는 쉬는 시간 마다 즐기던 독한 담배연기와 믹스커피의 냄새가 섞여 고약했다.
"야이자식아, 선생질? 누가 선생질이래? 내가 웃겨?"
변명할 겨를도 없이 정말 호되게 혼이 났고 조용히 얼버무려 지나가려 했던 일은 결국 모든 이의 주목을 받으면서 끝이 났다.
이 후 어떻게 된 일인지 학교에서 내게 여러가지 지원이 주어졌다.
안물 안굼... 안 물어봤는 데? 안 궁금했는 데?
나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다.
“너 그거알어?”라며 사람들은 모이면 흔히 이렇게 시작한다.
물론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 중에서는 잘못된 이야기나 허무맹랑한 오해도 있지만 굳이 바르게 잡으려도 하지 않는다.
난 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연을 아는 게 싫다.
어디선가 내 비밀이야기도 그렇게 다른 사람 입에 오르고 있을까 두려울 따름이다.
대신 학교에서도 가급적 가정사를 묻지 않는다.
최대한 아이만 보고 판단하려고 한다.
작년에 어땠는 지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억지로 모르려 피해본다.
가끔씩 너무 몰라 실수할 때도 있다. 그래도 차라리 모르는 게 아이들 보기에 편하다.
너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이 내 편이 되어 주는 듯도 하지만 그 비밀에 따라서 서로간의 족쇄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는 족쇄를 손에서 놓아줬지만 내 발에는 여전히 쇠사슬이 달려있던 것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