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엄마가 있다 - 당충전
엄마 미안해.
엄마가 나 살쪘다고 믹스커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
아니 사실 처음부터 이거는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몰라.
믹스커피 없이는 살 수가 없어.
건강에 안 좋다고 아메리카노를 먹으라고 걱정해주는 건 알아.
근데 당 떨어져서 도저히 안 되겠어.
내가 출근을 해서 교실에서 들어오는 순간부터 꼬맹이들하고 기싸움이 시작돼.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가 빈틈을 보이면 기똥차게 알아내고 파고들기 시작하지.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산 내가 참아야 하기에 내 몸속에 당은 급속도로 빠져나가.
그렇다고 꼬맹이들이 미운 건 아니야.
아이들도 늘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와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
나는 그 논리를 보다 사회적이고 안정적이게 이끌어줘야 하는 데 쉽지가 않아.
때로는 말이 길어져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를 때가 있어.
거짓 웃음을 지을 때도 있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도 티 안 내려고 꾹 참을 때도 있어.
"시끄러워! 조용히 해!" 한마디면 될 것 같지만 그럴 수도 없어.
난 선생님이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과정이 복잡해도 아이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일이니까.
어른 세상의 번역기인 거 같아.
그러다 보면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어.
그래서 오늘도 당과 카페인과 칼로리가 가득 들어있는 믹스커피를 마셨어.
벌써 세잔 째야.
근데 더 마실 거 같아.
이럴 땐 학창 시절에 엄마가 만들어준 토마토 주스가 생각이나.
여름에 땀 뻘뻘 흘리고 집에 오면 엄마가 한 번씩 해주던 달달한 토마토 주스.
믹서기 놔두고 굳이 강판에 갈아서 만들어 준 거.
거기에 외할아버지가 직접 채취해주신 꿀을 넣고
대접에 쓱쓱 저어서 만들어주면 그게 얼마나 맛있던지.
토마토 알갱이도 씹히고 덜 섞여서 먹을수록 단맛이 나곤 했지.
한 번씩 일하다 당 떨어지면 그게 그렇게 생각나.
학교에 토마토와 강판을 둘 순 없으니까.
어떻게 믹스커피라도 먹고 당 충전 해야지.
그래도 믹스커피는 짧은 시간에 싼 가격에 빨리 당 섭취를 할 수 있는 가성비 최고의 식품이야.
가끔은 아침에 타 놓은 커피가 먹을 새도 없어서 오후에 다 식어서 차갑게 먹기도 하고,
한 번에 두 개씩 다서 먹을 때도 있어.
정말이지 뜨거워도 미지근해도 차가워도 맛있다니까.
그래도 걱정 마.
더 살 안 찌게 운동은 할게.
종 쳤다.
남은 커피 한입에 털어 넣고 다시 수업 시작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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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힘들 때가 있다.
힘들 땐 엄마가 생각이 난다.
오늘만큼은 우리 반 아이들처럼
엄마한테 실컷 고자질하고 싶다.
어두운 밤 침대에 누워 졸려 무거운 눈꺼풀을 참고
하얀 창에 검정 글씨로 아무에게도 말 못 한 오늘을
두 엄지로 두드려 내려가 본다.
선생님이 되어도 난 엄마 아들이고
결혼하고 아빠가 되어도 난 엄마 아들이다.
나도 엄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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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모아온 글 하나씩 올리고 있는 데
이런 소소한 일상 마저도 참 오래된 일 같습니다.
어서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어서
아이들과 시원하게 한바탕하고
달달한 커피로 당충전을 하는 날이 오기를
바래봅니다.
모두들 기운내시기를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