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읽어요] 할머니가 생각나는 밤
워킹맘, 워킹댇 사이에 태어나 갓난아기 때부터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유치원생이던 시절은 저녁 전까지 할머니 댁에 먹고 놀고 하다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가곤 했는데 아빠가 선물을 사와야 집으로 갈 정도로 할머니 댁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 등굣날에도 할머니 댁에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등교했다. 이날이 기억이 나는 건, 내가 맨 꼴찌로 도착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보다 할머니네가 학교에서 멀어 가도 가도 학교가 나오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이 뒷문을 열고 본 나의 첫 교실 풍경은 모든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첫날 지각한 뒤로는 옆 동네에 살던 할머니가 엄마의 출근 시간에 맞추어 아침에 우리 집에 오셔서 나의 등교를 도와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할머니는 나와 어린 동생을 돌봐주셨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항상 할머니가 점심과 간식을 챙겨주시고 낮잠이 들기라도 하면 학원가라고 깨워주셨다. 감사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할머니에게 학원에 가야 되는데 왜 늦게 깨웠냐며 할머니에게 투정 섞인 짜증을 내기도 했다. (사실은 누구보다 곤히 잠들었으면서 말이다) 만약 집에 할머니가 계시지 않으셨다면 집에서 텔레비전을 벗 삼아 보냈을 것이다. 실제로 할머니가 안 오시는 날에는 MTV 채널의 뮤직비디오를 주야장천 홀린 듯이 보곤 했다. 누가 어떤 가수인지도 모르고 아홉 살 눈에는 괴상하게 보였지만 말이다.
언제나 내 곁에 든든히 계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내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다니는 학원의 가짓수가 많아지고,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보고 싶어도 자주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갔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결정적으로 할머니가 우리 남매를 더 돌봐주실 수 없는 시기가 온다. 나와 띠동갑인 막내 사촌 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할머니는 다시 어린 사촌 동생을 돌보게 되셨다. 그렇게 할머니의 손길은 나에게서 동생으로, 동생에서 사촌 동생으로 이어졌다.
할머니의 손길을 기억하는 내 동생과 사촌 동생에게도 '할머니'는 남다른 존재일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할머니 댁에 다녀올 때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한 번씩은 안겼다가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할머니'라는 단어는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할머니가 들어간 책에 유난히 눈길이 간다. 나는 오늘 소개할 두 권의 책 속에서 우리 할머니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내 마음을 울린 할머니의 일기와 지구 멀리 덴마크에 사는 할머니의 모습이 담긴 에세이를 추천하고 싶다. 특히, 할머니를 그리운 분에게 추천한다.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몇 개의 계절이 지나도, 자나 깨나 변함없이 자식 걱정을 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담긴 일기장이다. 할머니의 일기는 한 편의 시 같아서 늦은 밤에도 읽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우리 할머니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글쓴이 이옥남 할머니는 겨울이 오면 바깥의 새들이 먹을 것이 없을 텐데 어떻게 먹고 살지 염려하는 세상에 대해 따스함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집 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날에는 자식, 손자, 손녀 생각으로 가득하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기는 멀리 사는 손자가 할머니 댁을 방문했던 일을 쓴 일기다. 손자가 병원에 같이 가주었는데 할머니는 그조차도 손자에게 짐이 된 것 같아 내내 신경이 쓰이셨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같이 점심을 먹고 내내 누워있다가 손자를 가만히 지켜보신다. 그리고 오후가 지나자 손자가 시간 돼서 가봐야 한다고 했고, 저녁도 먹고 자고 갈 줄 알았던 손자가 예상치 못하게 가야 한다고 하자 담담하게 잘 들어가라고 배웅은 했지마는 끝내 멀어져가는 손자의 뒷모습에 아쉬워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를 배웅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떤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유년 시절엔 할머니 댁에서 엄청 많이 잤었다. 그런데 성인이 된 뒤로 언제 할머니 댁에서 잤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지난번에 할머니가 자고 가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결국 자고 오지 못했던 날이 생각이 난다. 나는 자고 싶었는데 부모님은 집에 가서 자라고 했다. 아마 그편이 이제 할머니도, 성인이 된 나도 편할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하셨겠지만, 불편해도 같이 자고 싶은 게 내 마음인데, 솔직하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할머니가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마음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더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평생 가늠해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사랑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깊이라는 것, 내가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든 간에 할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이 더 깊고 클 것이다. 지난날의 시간 동안 할머니가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앞으로의 남은 시간 동안에도 할머니가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내가 할머니를 생각하는 시간보다 많을 것이다.
『장래 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는 덴마크에서의 여행 인연이 닿아 한 달 동안 동거하며 기록한 포토 에세이다. 작은 물건이건 큰 물건이건 물건마다 서린 추억이 아쉬워서 버리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 것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고, 그것을 아끼고 사용하는 덴마크 할머니의 일상을 바로 옆에서 숨 쉬면서 기록하였다. 예를 들면, 낡은 소파 천으로 큰 에코백을 만들며 실제로 애용한다. 그리고 이 책은 포토 에세이인 만큼 북유럽 감성이 느껴지는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사진 두 장이 있다. 하나는 줄리와 아네뜨가 햇살이 비치는 연둣빛 정원에서 평화롭게 실뜨기를 하는 장면이다. 실뜨기는 아네뜨의 취미로 실로 양말이든, 가방이든 무엇이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낸다. 그 장면에서 할머니 생각이 났다. 나도 할머니가 코바늘로 떠 주신 레몬색 가방을 아직도 갖고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직 나만을 위한 가방. 아네뜨와 줄리가 물건들을 창고에 쌓아두고 버릴 수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물건들은 물건 이상의 추억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물건을 버린다는 건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버리는 기분이 들 것만 같다.
내 취미도 엽서를 모으는 것이기 때문일까. 다음으로는 기억에 남은 장면은 산업디자이너였던 줄리의 할아버지, 어위의 포스터들과 줄리의 아빠가 줄리에게 보냈던 엽서들이다. 나는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거나 전시회에 가서 마음에 드는 엽서가 있으면 고심해서 고른 뒤 기념으로 가지고 온다. 줄리의 아빠는 일의 특성상 여러 장소를 돌아다녀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줄리에게 엽서를 부쳤다고 한다. 이 사진들 외에도 책 속에는 많은 이야기와 북유럽 감성의 사진이 담겨있다. 이 책은 덴마크의 한 가족의 추억들을 기록하기도 하여지만 이렇게 책 사이사이에 여러 색감이 어우러진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있다.
오늘 소개한 책들을 읽고 일상에서 할머니 생각을 더 많이 났다. 그래서 유독 올해는 할머니에게 카톡도 많이 하고, 이모티콘도 보내보고, 길 가다 이쁜 풍경이 있으면 사진도 보냈나 보다. 학교에서 할머니 집까지 한 시간 거리지만 그동안 못 드셔보셨을 방금 나온 따끈한 에그타르트도 사서 가져가 보고, 원래도 좋아하셨던 매콤한 김치만두를 사가기도 했다. 퇴근하고 바로 할머니 집으로 들려 할머니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올해 어버이날 선물로 립스틱을 사드렸는데 마스크를 쓰고 다니느라 잘 쓰지도 못하셨다고 하셨다. 마스크를 벗고 내가 사드린 립스틱을 다 쓰고 다음 립스틱, 그 다음 립스틱을 사드릴 수 있을 때까지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는 할머니가 참 좋다. 책 추천을 빌미로 할머니에 대한 글을 남기는 지금도 할머니를 떠올리면 코끝이 찡해지는 울보가 된다. 할머니가 너무나 좋아서,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고, 사랑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못 해드리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게 미안해서. 이 행복한 시간이 언젠가 끝나는 이야기가 될 거라는 게 너무나 아쉬워서 눈물이 난다. 할머니란 단어만 떠올려도 할머니와 함께 보냈던 시간, 추억, 할머니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이별을 살짝 떠올리기만 해도 주책처럼 눈이 붉어진다. 그만큼 그녀와 함께하는 지금이 소중하다. 나도 이런 할머니처럼 늙어갈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오늘 밤은 할머니 곁에서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