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교실 바라보기] 3. 지식의 본질
이 글은 두 가지 사건으로 시작했다.
첫째, 원어민과의 대화 중 한국의 영어 교육에 "How are you? - I'm fine thank you and you?"로 가르치는 상황들이 많다는 것.
둘째, 방과후 영어 시험에 skip이 건너뛰다는 맞으나 넘기다는 틀리다고 하는 채점을 하는 것.
지식이 껍데기만 남은 이 상황이 답답해 글을 써본다.
사과의 본질
사과의 본질은 무엇인가? 빨간색? 구의 모양? 달콤한 맛?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당연한 얘기로 사과의 본질은 사과 그 자체이다.
다만 인간이 그 물체를 말로 정의하기 위하여 '사과'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오감을 동원하고 아무리 과학적으로 성분을 분석해도 본질에 가까워질 뿐 결코 본질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빨간색이 본질이라 말한다면 녹색 사과는 부정된다. 색에 관한 사과의 본질을 논한다고 해도 그 색을 절대 정의 내릴 수 없다. 사과가 익어가는 동안의 색 변화, 다른 종의 색, 썩어가면서 나오는 색, 내부의 과육, 씨앗 등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해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어떤 지식에 대해 끝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모든 것을 알았다고 느껴도 본질에 무한대로 다가갈 뿐 절대 그 지식을 단정해선 안된다. 그 당시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만물이 변한다는 불변의 법칙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지식의 형식
대학에서 배웠던 지식의 구조, 지식의 형식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다만 그 당시 수업은 이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해주지 못 한 것 같다. 또한 지식의 구조와 형식을 말한 창시자가 나와 같은 개념으로 말했는지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지식의 형식은 지식의 본질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 같은 것이다.
선물을 전하기 위한 포장이 있듯 내용을 전하기 위한 형식이 있는 것이다.
물론 아기가 말을 배우듯, 시작을 위한 기초에서는 형식이 중요할 것이다. 사과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사과의 본질을 논할 수 없듯이..
하지만 형식주의에 빠지면 본질을 잃어버릴 것이다.
교육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 가정, 기업, 국가 등 모든 곳에서 마찬가지이다.
본질에 다가가는 것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 이는 본질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는 본질을 결코 단정할 수 없다는 깨달음의 단계를 말한다. 어떤 분야에 있던 본질에 다가가는 깨달음을 얻은 자는 결코 자만하거나 방만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에 남는 성인군자들은 모두 이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시초로 돌아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한 면을 보기 위해서는 정확히 한 면의 수직에서 면을 바라본다. 두 면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의 모서리를 바라본다. 세 면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의 꼭짓점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뒤의 세면을 보기 위해서는 그 사물을 여러 관점에서 살펴본 뒤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
한 곳을 정확히, 제대로 바라봐야 그곳이 오롯이 보일 것이며, 관점을 달리하여야 여러 면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눈을 넘어서는 경지가 되어서야만이 본질을 보게 될 것이다.
essence = es(extra) + sense
본질은 감각 너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