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학교 바라보기] 17. 내 삶과 교직 - 6) 거절할 용기와 창의성
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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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0 14:23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요, 없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말해보라."
철학자 강신주의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나오는 임제 스님의 일화이다.
여기서 맞지 않을 수 있는 답은 그와 무관한 대답을 하는 것이다.
차 향기가 좋네요. 바람이 시원하네요. 등
사실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은 질문을 무시하는 것이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대답을 한다면 1대 맞을걸 10대는 맞을지 모른다.
이는 질문자를 무시하는 행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
창의성은 질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찾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물건에서의 창의성
몽둥이를 보며 난 이런 대답을 하고 싶다.
"막대기가 있네요. 검도를 배우시나요"
"방망이가 있군요. 먼지 털러 가시나요."
지팡이가 있네요. 요술봉이 있네요. 등등
스승은 사물에 귀속된 사고를 넘으라는 지혜를 주려 했다지만..
난 스승의 질문을 무시할 생각도 없고, 실제 보이는 물건을 무시할 생각도 없다.
난 그저 몽둥이를 긍정하지는 않았다.
그 '물건'이 몽둥이인지는 나의 결정에 따른 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컵을 장난감으로 쓴다.
누군가는 컵을 악기로 활용해 '컵타'라는 음악을 만들기도 한다.
컵을 물 먹는데 쓰라고 한 건 만든 사람일 뿐이다.
물건의 용도는 어쩌면 고정관념 일지 모른다.
물건을 조합하고, 확장하는 것은 그로부터의 자유다.
창의성은 물건이 갖고 있는 기존의 영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에서의 창의성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업무 간 연관성을 찾고 확장한다.
단지 새로움이 아닌 효율과 합리성을 찾는다.
허나 쉽지 않다.
물건은 전혀 다른 용도, 우연도 가능할 수 있다.
일은 계획, 실행, 결과보고 등 정해진 매뉴얼이 있다.
정해진 목적을 모두 달성하면서도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일에서의 창의성은 물건에서의 창의성보다 갖기 어렵다.
일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에서는 나의 고정관념만 넘어서면 된다.
일에서는 '너의 고정관념'도 넘어서야 한다.
관계에서의 창의성
다시 임제 스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당신은 '몽둥이'를 들고 있는 스승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거기다 맞는 대답이란 '차 향기가 좋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데.
답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냔 말이다.
당신 혼자서는 창의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창의성은 관계의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생각을 갖고 있어도 꺾이면 끝이다.
직장상사의 꽉 막힌 업무지시를 거절할 수 있다면, 효율적인 업무처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인관계에 정해진 데이트를 거절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명절 기대를 거절할 수 있다면, 차 막힘없는 여유로운 대체 명절을 보낼 것이다.
모든 관계를 멋대로 하라는 말은 아니다.
함께 한다는 건 서로 양보하는 부분 없이 이룰 수 없다.
다만 거절할 수 있는 관계에서 더 다양한 '우리'를 찾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고 싶다.
교사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싶다.
교사와 학생이기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고 싶다.
사람이 사람임을 놓치는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