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학교 바라보기] 2. 너는 '그릇'이란다
누가 교육을 무엇이라 정의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지금 당신이 교육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릇에 집어넣는 교육
과거의 주입식 교육, 지식위주의 교육 논조에서 이러한 일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릇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치 않다. 가장 많은 것을 담는 그릇을 가장 좋게 쳤다.
이 시대의 교육은 그릇을 사용할 사용자의 입장을 명확히 대변한다.
그저 많이 넣기 위해 쑤셔 넣었다. 그 와중에 깨지는 그릇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그릇을 키우는 교육
좋은 말로 '성장'이다.
하지만 잘못된 잣대나 단편일률적인 기준으로 '큰 그릇'을 찍어내려 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키운다'에 맹목이 되어 잘못된 방법으로 키우려고 한 일도 정말 많았고..
아직도 교육은 이 그릇을 사용할 사람의 눈으로 보는 듯 하다.
큰 그릇을 원하나 보다..
그릇을 이해하는 교육
사람은 모두 다르게 태어난다. 그 그릇의 모양, 크기, 재질 등은 정말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그 그릇에 맞는 성장을 이끌어줄 수 없다. 무쇠 그릇에 못질을 하고, 유리 그릇에 망치질을 하며, 나무 그릇을 불에 넣어버릴 지도..
그릇을 이해하면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큰 대접은 많은 양을 담기에 적당하고, 작은 종지 그릇은 작은 양념을 담기에 적당하다.
큰 그릇은 큰 그릇대로, 작은 그릇은 작은 그릇대로의 성장이 있는 것이다.
그릇을 주인에게로..
교사는 가르쳐 그릇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학생은 자신의 그릇에 맞는 성장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릇은 주인인 '사용자'에게 돌아간다.
교육의 본질은 그릇의 성장, 배움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의 주인은 학생이 근본이어야 하고, 그를 성장시켜주는 교사가 두 번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교육의 결과를 실제로 사용하는 자는 교육 주체인 교사, 학생이 아닌 다른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너라는 그릇을 누군가 사용하도록 살지 말아라. 너 자신이 그 그릇의 주인이 되어 무언가를 담으며 살아라.
떠나보내기 위해 새를 키운다.
내가 키우는 새가 어떤 새인지, 그 새가 어디로 날아갈지 장담할 수 없다.
그저 그 새가 날아갈 수 있도록 키운다.
자기가 날아가고 싶은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