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학교 바라보기] 6. 당신의 교실이 욕먹는 이유
사랑하는 곳과 존재하는 곳이 다를 때 당신은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고 했다.
무엇을 사랑할지 결정했다면 이젠 그곳에 존재할 힘과 용기를 가질 차례이다.
선택과 집중
아이들을 선택한 당신이 존재할 곳은 당신의 교실이다.
티타임을 깨고 "수업시간이 되서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공문을 미뤄놓고 "수업끝나고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동시에 "저 사람은 자기 혼자만 참교사인척 하네."하는 소리를 감당할 용기도 필요하다.
아이들을 선택했다면 동료교사는 좀 뒤에 둬도 좋다.
아이들은 당신을 절대 이기적인 사람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기적이지 않다.
당신을 욕할 동료라면 멀리 둘수록 좋다.
선택과 핑계
가족을 선택해 칼퇴하는 사람은 진정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을 것이다.
허나 빠져나오기 위해 가족을 팔아 칼퇴하는 사람은 그 가족에게도 욕먹고 있으리라.
교실을, 학생을 핑계삼아 전체의 일에서 빠져 나오려는 사람.
함께 해야 하는 일에서 개인의 일을 하는 사람.
사람을 선택한척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
인간관계를 핑계삼아 개인의 인맥과 점수를 따려는 사람.
학생을 채우고, 동료를 채우고, 사회를 채운다 말하지만 결국 자신을 채우려 할때 이기적이다.
무엇을 선택한 것은 그 곳에서는 사랑받을 일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선택한척 하며 자신을 채우려는 핑계를 대고 있다면 어디에서든 욕먹을 것이다.
선택의 크기
후배나 윗 사람들에게도 잘 하고 외부 기관에도 잘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아직도 욕은 존재한다.
스티븐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가 어떤 글을 쓰든 7의 무관심과 2의 좋음과 1의 싫음이 있다'
내가 어떤 사회에 속하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를 선택하려는 사람은 1의 싫음까지 보려 한다.
그리고 영역이 확장된 사람은 많은 1들과 함께한다.
당신이 무엇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는가.
정말 그 결심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곳에서 들어오는 욕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교실에서조차 날 싫어하고 내 교육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 아이가 있을 수 있다.
내 선택의 크기가 커질수록 욕의 크기도 커짐을 잊지 말자.
강제된 선택
과거에는 장학사들이 오면 수업 외적인 내용도 정말 많이 봤다. 교실 환경구성이며 청소상태 등.
내가 초등학생시절 장학사가 온다면 왜 그리 구석구석 청소를 시켰는지 알 것 같다.
차라리 청소 컨설팅을 받으려면 청소 용역업체에 받는 게 나을 것이다.
스마트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과거의 차분하고 정돈된 교실을 옳다고 여기는 교사에게 컨설팅을 받는다.
스마트교육을 하고자 하는데 스마트교육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컨설팅을 받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 사람이 원하는 수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욕을 먹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수업을 할 것인가.
내 삶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 나눌 사람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다른 길에 있는 이야기는 의미 없다.
내가 가는 길을 부정하려는 사람과 같이 동행할 수 없다.
행복을 찾아
선택에 따른 욕먹음은 어느 정도 감당해야 한다.
그 선택이 핑계가 아닌 진심이길 바란다.
당신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욕은 온사방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원치 않는 선택을 당하지 말고, 당신이 살아있을 곳을 찾아 선택해가길 바란다.
안전은 위험을 없앰으로, 정의는 불의를 없앰으로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행복은 날 욕할 사람을 없앰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나의 길을 결정하고 나와 함께 할 사람을 찾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