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집보다 학교가 재미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지인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진즉에 강릉으로 갔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해시나 삼척시에서는 제대로 된 대입 준비를 할 수 없다고 그랬다. 그나마 강원 영동 지역에서는 강릉이 가장 크고, 사교육 인프라도 비교적 갖춰져 있으니 아이를 강릉 시내에서 키웠어야 하는데 시기를 미루다 영영 놓쳐버렸다는 한탄. 그분은 내게 꼭 알아두어야 할 팁이라며, 소도시에서 자녀를 키울 경우에 취할 수 있는 전략을 알려주었다.
“내신은 여기서 따고, 방학 때는 수도권 가서 기숙형 학원에 보내는 거야.”
지역균형선발 전형이 있는 대학의 이름을 여럿 들었다. 나는 미취학 아동 둘을 키우는, 초등학교 5학년 학급의 담임이다. 집에서는 양치질과 장난감 정리를 가르치느라 매일 전쟁이고, 학교에서는 온라인 수업 출석과 과제 점검 및 독려로 씨름 중이다. 입시 얘기를 꺼낸 선생님께 아직 나는 피부에 와닿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더니, 격한 손사래가 돌아왔다.
딸은 교우관계가 중요해서 초등 시절에 맺은 친구들 때문에 머뭇거리면 나중에 큰 도시로 못 나간다, 동네 분위기라는 게 있어서 어릴 때부터 적응시키는 게 낫다, 과외나 학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의 종류가 다르다 등등 절박함이 담긴 조언을 강제로 흡수했다. 거기서 나는 아이를 영어유치원에도 안 보내고, 화상 영어도 안 하는 그저 무심한 아빠였다. 교사 아빠라고 해서 입시에 능한 건 아니니까.
사람들은 교육을 대학입시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이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안다. 내가 직업으로 초등학교 교사를 한다고 하면 “애들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하겠네”라든가, “수업 준비 편해서 좋겠다” 같은 말을 듣는다. 입시와 거리가 먼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교육이 아니라 보육에 가깝다는 생각은 뿌리 깊다. 어쩌면 “여자 직업으로 초등교사만 한 게 없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근무조건이 좋아서 얻기 어려운 자리” 따위의 편견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 교육정책을 논하는 자리에 경력 많은 현장 교사가 초대받지 못하는 현실도, 교육은 곧 대입이라는 명제의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코로나19로 개학이 몇 차례 연기되었고, 온라인 수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입시 일정은 굳건하다. 학생이 학교에 나오는 기간이 짧을수록 교육 불평등이 심해진다는 연구 결과는 숱하다. 이런 불공정 논란에도 불구하고 짧은 등교 기간에 아이들은 시험을 치느라 바쁘다. 내신을 산출하고, 학생 생활기록부에 적어 넣을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시험 치러 오는 곳이 되어버렸다.
결핍이 심어준 소중한 경험
정작 내가 등교 기간에 바라는 것은 학생과의 깊은 교감이다. 코로나19 이후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등굣길에 친구와 인사하고, 팀 나눠 피구하는 일상을 잃었다. 하루 평균 네 시간 이상을 스마트 기기 앞에서 보낸다. 온라인이라는 차선책으로 진도는 어떻게든 맞출 수 있지만, 눈빛과 목소리로 상호작용하며 감정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사라졌다.
학교가 아이의 전인적 성장을 돕고,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립할 수 있도록 이끌려면 촉박한 시험보다는 대화하며 교감하는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하다. 교사도 학생과 못 만나고 양질의 수업을 하지 못하면 직무 만족도가 떨어진다. 하물며 움직이려는 욕구가 왕성하고 다양한 자극에 목마른 아이들은 오죽할까.
우리 반 학생에게 물어보았더니, 놀랍게도 전원이 집보다 학교가 더 재미있다고 했다. 코로나 시대를 겪은 아이들은 대학입시 성공과 좋은 일자리 획득이라는 어른의 잣대를 넘어 학교 고유의 가치와 의미를 체감하고 있다. 규칙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고, 선생님 그리고 친구와 더불어 배우는 즐거움이 있는 학교. 굳이 의도할 필요는 없지만, 결핍이 때로는 소중한 경험을 심어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