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국수 지린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경험한 '급식체'
"잔치국수 지린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경험한 '급식체'
[로또교실31] 선생님까지 덩달아 사용하게 된 '급식체', 안 쓰도록 유도하는 방법
얼마 전부터 미니 '손 하키 게임'을 교실에 놔두고 놀고 있는데 제법 인기가 높았다. 애들 하라고 샀는데 막상 해보니 손맛이 있어서, 사제동행 핑계 대고 점심시간 10분씩 꼬박꼬박 즐겼다. 규칙은 간단했다. 세 골을 먼저 넣으면 승리하고, 패배하면 다음 차례 사람에게 넘겨주기.
산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아이들이 순진하게 직선으로만 슛을 날려 압도적으로 경기를 이길 수 있었다. 괜히 허점을 보여 한 골을 헌납하기도 하고, 초보자의 대수롭지 않은 플레이에 폭풍 칭찬을 날려줬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졸지에 '오지다'라는 말을 쓰게 됐다
골이 들어가는 순간이다. 손하키는 순발력이 요구된다.
"2:2 산하 대박 빨라."
"쌤 봐주지 말고 진짜로 해요!"
언제부터인가 2:2 스코어가 되는 날이 많아졌다. 전력으로 승부했다.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2:2 상황에서 여유 부릴 배짱이 없었다. 소매를 걷고 손목을 풀었다. 산하는 상대가 왼쪽 측면을 파고들어 오른쪽 벽을 향해 슛을 날리면 못 막는다. 중계하는 성욱이가 계속 같은 노림수에 당하는 거 같다고 알려줘도 눈앞에서 뻔히 먹혔다. 치사해도 어쩔 수 없었다. 산하의 약점을 노려 그 코스로 공을 날렸다. 골이었다!
"우와! 쌤 요번에 완전 오졌어!"
"내가 좀 오졌냐? 우하하하."
소리가 컸던지 주변에 있던 학생 몇몇이 경기장 쪽을 빤히 봤다. 이겨서 몹시 기분이 좋았다. 구경꾼 건율이랑 하이파이브하고 괴성을 질렀다. 1시 24분이었다. 6분 뒤에 수업이니 자리 정돈하고 앉으라 했다. 털썩! 의자에 앉아서 돌이켜보니 아찔했다.
'내가 아까 분명 오지다고 했지. 대학 동기들 채팅창에서나 쓸 말을... 큰일났다.'
말실수했다고 사과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신나서 손뼉까지 마주친 마당에 구차하게 선생님은 본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변명해봤자 그림만 이상해질 게 뻔했다. 그렇지만 오지다는 말이 너무 컸고 들은 제자도 상당수였다. 교실에서 선생님은 움직이는 광고판이다. 손짓 하나, 뒤통수 까딱거림 하나까지 아이들이 따라 하고 배운다. 답답한 마음에 포털 검색창에 '오지다'를 쳐봤다.
오지다 - 같은 말 : 오달지다
오달지다 : 1. 마음에 흡족하게 흐뭇하다, 2.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알차다.
오! 신이시여, 이대로 죽으란 법은 없었다. 국어사전에 분명 '오지다'가 나왔다. 그것도 매우 건전한 뜻으로, 좀 전 상황과도 잘 들어맞았다. 즉석 강론회를 열었다.
"여러분, 선생님이 아까 손 하키 하다가 오지다고 했지요? 그거 표준어예요. 마음이 흡족하게 흐뭇하다. 이런 말이에요."
"아~ 그렇구나."
역시 3학년이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는다. 5학년만 되었어도 '쯧쯧, 치졸한 인간'의 눈빛을 마구 쏘았을 것이다. 안도의 순간도 잠시, 더 큰 문제가 터졌다. 애들이 대놓고 '오지다'를 쓰기 시작했다. 담임이 몸소 분위기 잡아가며 공인한 언어를 쓰는 것은 당연지사. 태어나서 오지다는 표현을 가장 많이 들은 날이었다.
'오지고 지리다'라는 말 쓰는 아이들 말리는 방법
학급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 하나. 급식체는 일상적으로 쓰인다.
언어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고 했던가? 오지다는 '오지고 지리다'로 번졌다. 급식체의 양대산맥인 '오지다'와 '지리다'는 모두 놀라거나 충격인 장면에서 사용하는 감탄사이다. 신성한 배움의 장에서 굳이 유행하는 비속어를 적극 권장할 까닭이 없었다. 어제의 행운에 기대어 '지리다'를 검색창에 입력했다. 여러 개의 하위 뜻 중 하나라도 긍정적인 의미를 닮고 있다면, 계기교육 삼아 급식체의 뿌리를 알아보겠노라 하면 될 터였다.
헛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지리다'는 익히 알고 있듯, 똥이나 오줌을 참지 못하고 조금 싼다는 의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정면승부를 하기로 했다.
"잔치국수 지린다 지려."
"저런, 팬티에 똥 묻었으면 씻고 오세요."
"엥? 저 똥 안 쌌는데요?"
지리다는 동사가 들릴 때마다 씻고 오라고 타박을 줬다. 오줌 싼 거 아니라는 항변이 돌아오면, 표준국어대사전에 표기된 정의를 천천히 읽어주었다. 초등학생은 똥과 오줌, 방귀에 취약하다. 어쩌다 엉덩이에서 '뿡' 소리가 나면 큰 죄를 지은 듯 부끄러워하고, 화장실에서 대변 보다 걸리면 그날로 '똥쟁이'가 된다. 그러니 스스로 "나 똥쟁이에요" 하고 홍보할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지리다'는 등장 하루 만에 자취를 감췄다. '지리다'가 사라지니 자연스레 '오지다' 열풍도 꺼졌다. 아이들이 말은 안 해도 우리 담임 선생님이 쓴 '오지다'가 그 '오지다'가 아님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감추려 교사의 권위를 동원했다. 유치하고 얄팍한 술수였다. 정말 오지지 못한 처신이었다.
요즘 것들 이상한 말 쓴다고 혼낼 필요 없다. 뭐, 우리라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만 사용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무릇 언어란 시간과 장소, 상황에 맞게 적절히 살아 움직여야 정상이다. 내 경우야 근무시간에 그랬으니 입이 스무 개라도 할 말은 없다. 그나저나 급식체 이거 쓸수록 입에 쫙쫙 붙는다. 급식 먹고사는 사람이라 궁합이 맞나 보다. 진심 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