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샘's 여행에세이 #02] 지베르니- 정원의 빛
[나의 클로드 모네 #02 지베르니- 정원의 빛]
지베르니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이제 막 붓을 뗀 수채화처럼 온 세상이 촉촉하게 젖은 날이었다. 파리 시내를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비에 젖은 이파리들이 후드득 후드득 연두빛 물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꾸 궁금해진다. 그 사람이 어떤 것에 반응했는지, 무엇을 추구하며 생활했는지. 그리고 왜 이런 흔적을 남겼는지. 그 궁금한 마음이 나를 프랑스의 이 작고 조용한 마을로 이끌었다.
모네의 집 꽃의 정원에 들어서자 방금 세수를 마친 얼굴처럼 싱그러운 꽃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폭신하게 젖은 흙냄새와 빗물을 머금은 풀냄새가 코끝을 시원하게 스쳐 폐부로 드나들었다. 여기가 지베르니인 것도, 모네를 만나러 온 것도 잊은 채 남편과 손잡고 아침산책하듯 그 싱그러운 풍광 속을 거닐었다.
이윽고 물의 정원에 이르렀다. 연못에 비친 수련과 버드나무 사이로 모네의 그림이 하나씩 어른거렸다. 매일 아침 화가는 이 연못가에 서서 수면에 비친 빛을 붙잡아 담기위해 애썼을 것이다. 눈으로 흔들리는 물결을 응시하면서 손으로 쉴새없이 색을 섞고 붓칠을 반복했을테지.
베토벤이 귀머거리와 다름없을 때 작곡한 것 처럼, 모네도 장님에 가까운 상태로 그림을 그렸다. 노랑과 빨강조차 제대로 구분할 수 없는 시력으로 기억과 감각에 의존하여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고 색을 칠했다. 흐릿한 눈으로 캔버스를 더듬어 나가면서 그는 끊임없이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나는 우주가 내 앞에 펼쳐 보이는 광경을 보고 붓이 그것을 증언하도록 했을 뿐이다.” 말년에 수련 연작을 그리면서 모네가 했던 말이다. 정원은 모네가 가진 생명력과 창조력의 원천이었다. 그가 붓으로 그린 것은 예술과 자연이 공명하는 순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다시 파리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기울어가는 해를 뉘엿뉘엿 바라보면서 내 창조력의 원천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내 거실 책장에 쌓인 밑줄 그은 책들, 나를 건드리는 예술가들의 그림, 새벽녘 글을 쓰다 왼쪽으로 고개돌리면 거실창을 청명하게 비추는 달빛.
이대로 기차를 타고 땅끝까지 달려 곧장 달빛이 내리쬐는 내 책상으로 돌아간대도,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