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상담소] #05 작고 약한 새싹처럼 솎아낼까 두려워요(솎아내기)
*통로 현아샘의 그림책 상담소입니다. 2015년부터 진행한 ‘교실 속 그림책 창작 프로젝트’를 통해 아이들이 털어놓은 고민에 그림책으로 답합니다.
통로 현아샘의 [그림책 상담소]
#05 작고 약한 새싹처럼 솎아낼까 두려워요.
“선생님, 저 실과 시간에 솎아내기 배울 때 충격 받았어요. 뽑혀나가는 약한 새싹이 꼭 나 같아서요.”
혜빈이는 실과 시간에 솎아내기를 배우다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실과 교과서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거든요.
※솎아내기란? 튼튼한 작물이 더 잘 자라도록 약한 작물을 솎아내는 일
혜빈이는 큰 새싹들을 위해서 작은 새싹을 솎아내는 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작다는 이유로 성장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니까요. 아마 작고 약한 새싹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큰 새싹을 위해 그냥 뽑히기는 싫어. 나중에 누가 더 클지 어떻게 알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고 뽑아내어 버리다니...’
혜빈이는 솎아내기를 보면서 경쟁적인 사회구조가 떠올랐다고 해요. 뉴스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불안했기 때문이죠.
‘나도 입시 경쟁에 밀려서 대학에 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취업이 어렵다는데 나도 일자리를 못 구하는 건 아닐까?’
‘일자리를 얻어도 구조조정 때문에 솎아내어지면 어떡하지?’
뽑혀져 나가는 작은 새싹에는 소심한 아이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경쟁에서 도태될까봐 웅크린 아이들은 작고 약한 새싹에 공감합니다.
그렇게 혜빈이는 학교와 사회에서 솎아내듯 뽑혀지는 약한 것들에 주목하면서 [교실 속 그림책] 솎아내기를 창작했습니다.
혜빈이가 창작의 씨앗을 발견한 건 다름 아닌 실과 교과서에서였어요.
사려 깊은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면 쉬는 시간에 똥 싸는 일도 시가 될 수 있고
_쉬는 시간에 똥 싸기 싫어(김개미)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기에게서도 글감을 발견할 수 있지요.
_모기네 집(강정규)
그림책 창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그림 실력도 글빨도 아닌 ‘사려 깊은 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사려깊은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면서 곳곳에 숨어있는 이야깃거리를발견해냅니다. 어른의 심드렁한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말이죠.
혜빈이의 그림책 <솎아내기>를 읽으면서 친구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소리는 솎아내기를 보면서 왕따를 떠올렸습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 왕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센 아이들은 살아남는데 약한 아이들은 소외감을 느끼니까….”
키가 작은 재호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싹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내가 만약 싹이었다면… 분명 사람들이 날 뽑아냈을 거야. 키도 작고 약하니까…”
이런 친구들에게 혜빈이는 그림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들아 걱정 마. 식물은 솎아내기로 약한 새싹을 뽑아내지만, 사람은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잖아.”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뽑혀질까봐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우리 불안해하지 말고 힘내자’라는 말을 건넵니다.
그림책 창작을 진행하면서 솎아내기를 통해 삶의 문제를 성찰하는 혜빈이만의 날선 시선에 감탄했습니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길 바라는 아이의 마음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고요.
그런데 그와는 별개로 혜빈이의 그림책을 덮으면서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힘들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아이들에게 '솎아내지기 싫으면 경쟁에서 도태되지 말고 이겨내라'고 말합니다.
온실이 아닌 현재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무턱대고 ‘걱정말고 화이팅하자’는 말을 건넬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무한 경쟁의 사회에 아이들을 내보내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말랑한 위로만 건네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요.
아무도 솎아내지 않고,
누구에게도 솎아내어지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
아이들이 감내해야 할 이 사회에서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이 경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함부로 단정하거나 얄팍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고민하던 중에 시 한 편을 읽다가 답을 얻었습니다.
[교실 속 그림책]솎아내기를 읽고 지영이가 쓴 시였어요.
솎아내더라도 뿌리를 꺾어버리지 말고 다른 화분에 심어주면 좋겠다는 지영이의 시를 읽는데
오래도록 가물던 땅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가슴이 촉촉해졌습니다.
'넌 뿌리가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서 다시 크면 되는 거야'라는 지영이의 위로는 결코 가볍지도 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들 뿐만아니라 교사인 저에게도 묵직한 위안과 신선한 지혜를 전해주었어요.
지영이의 시를 읽고 재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솎아내져도 괜찮아요."
그리고 제가 그동안 오래도록 품어온 고민에 대해 이런 시로 화답해줬습니다.
재호의 시를 읽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한참을 행과 연 사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면접에 떨어지더라도
내 뿌리에 대한 믿음으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힘
나와 맞지 않는 흙을 훌훌 털고 일어나
나의 흙을 만났을 때 잘 자라도록 준비할 줄 아는 태도
아이의 인생에서 솎아내지는 일을 모두 없애줄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이 시간을 통해
내 뿌리에 대한 믿음과
내 흙을 준비하는 태도
그걸 길러줄 수 있다면
그래, 그걸로 됐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빈 교실에 우두커니 앉아
크리넥스를 끌어다 콧물 한 번 풀고,
눈두덩이 두 번 꾹꾹 누르면서
교실에 내리쬐는 오후 햇살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살면서 여러번 솎아져도 괜찮다고,
난 너의 뿌리를 믿는다고.
아이들에게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교실 속 그림책] 솎아내기(글 그림 이혜빈, 교육미술관 통로)의 전체 본문은 아래의 링크에서 전자책으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coolbooks.coolschool.co.kr/books/ae04bead-83ed-4ade-93cc-345ee586997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