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마음
아이와 다양한 놀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정말 단순했다. 우리 반 학생들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싶어서 다양한 책 혹은 자료를 찾아보며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학습 활동을 계획한다. 그 준비과정 자체가 즐거움이었고, 학생들이 몰입하는 모습을 볼 때면 교사로서의 자존감까지 높아질 만큼 나도 더불어 수업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아이와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하고 자문해보았다. ‘하루 한 시간쯤은 내 아이와의 놀이를 위해 준비하거나 놀아줄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물론 온종일 학교에서 에너지를 쓰고 퇴근한 후인지라 쉽지는 않았다. 허나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매일이 같을 수만은 없는 예외적인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갑자기 생긴 신랑의 직장일 때문에 어제 저녁은 두 아이를 내가 돌봐야했다. 계획에 없던 것이라 정신없는 시간이 될 거라 예상했지만, 급한 대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다. 놀이터에서 잠시 놀고, 장을 보고, 아이들을 씻기고, 저녁먹이고,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우유가 있으니 마블링 놀이를 해야겠다. 그래, 그러면 시간이 좀 가겠다 싶었다.
그렇게 계획대로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둘째가 보채기 시작한다. 배가 고프다는 신호였다. 이미 또지와 우유 마블링 놀이를 하려고 준비해놓은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놀이 방법을 알려주고, 방에 들어와 둘째 수유를 시작했다.
“이히히히, 아이, 차가워~!”
웃음소리가 들려와 재미있나보다 싶었는데, ‘아이, 차가워?’라는 말에 우유에 손을 담그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 또지랑 놀면서 느낀 것들 중 하나는 아이는 역시 계획대로만 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계획한 것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놀 때가 있어서 나 역시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았는데, 오늘도 그렇구나 싶었다.
수유를 마치고 거실에 나가보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거실 바닥을 비롯해 놀이매트와 쿠션에까지 물감이 튀어있었다. 통에 손을 담그고 노는 것에 집중한 또지는 주변에 물감 섞인 우유가 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못 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만큼 놀이에 몰입했을 테니…….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나는 ‘갑자기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평정심이 붕괴되면서 잔소리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또지야, 엄마가 노는 방법 알려줬는데, 이렇게 놀면 어떻게 해? 주변 봐봐. 물감 다 튀었잖아. 이거 어떻게 치우라고.”
웃으며 신나게 놀던 또지는 평소와 다르게 엄마가 채근하기 시작하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엄마, 미안해요~ 미안해요~”
또지의 작고 고은 입에서 ‘미안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버쩍 들었다.
‘내가 또지랑 같이 놀이할 때 가장 큰 목적이 뭐였지?’
우리는 항상 미술놀이를 할 때 ‘묻어도 돼. 닦으면 되니까. 어지럽혀도 돼. 치우면 되니까.’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했었다. 아직은 어린 연령이기 때문에 제한을 두고 놀면 놀이 방법이나 아이 마음에 제약이 생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유롭게 즐기며 웃으면 되는 거였지, 오늘처럼 또지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함은 절대 아니었다. 품에 안고 있던 둘째를 잠시 내려놓고, 또지를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또지야, 이리와.”
울던 또지는 내 품에 들어와 조금은 더 서럽게 우는 듯했다.
“아니야, 또지야. 엄마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미안해. 우리 원래 놀 때 묻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고 했지?”
“닦으면 돼~”
“맞아, 그럼 쿠션에 물감이 묻은 건 어떻게 하면 될까?”
“으응~ 그건 빨면 돼!”
엄마 품에 안겨 마음이 다독여졌을까? 또지는 금세 내게 방법을 찾아주었다는 듯이 야무지게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 또지에게 묻는 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건데 왜 아이를 채근했을까. 놀라고 판 깔아준 건 나면서…….’
“또지야, 통에 손 담그니까 재미있었어?”
“응~ 엄청 시원해~ 엄마도 해볼래?”
“그래~ 아우, 차가워~!”
“크크크크, 그치? 차갑지? 또 해봐~~”
다시 기분이 나아진 또지는 손을 담그며 조금 더 놀았다. 처음에 웃으며 놀았던 것처럼.
맞다. 옷이랑 쿠션커버는 세탁하면 되고, 바닥은 닦으면 된다. 그런데 잠시 두 아이를 돌보며 지쳤던 나는 우리가 함께 세운 놀이의 원칙을 잊고,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대하고 몰아세웠던 것 같았다. 오늘은 다행히 쉽게 회복했지만, 앞으로 오늘을 잊지 말아야한다. 아이와 함께 놀자고 시작했으면, 부모의 태도(혹은 마음)나 놀이의 원칙 등은 시작과 끝 모두 동일해야 한다. 그 일관성과 지속성이 아이와 나 사이의 신뢰를 쌓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교실에서도 이러한 때가 있었다.
모둠 활동이나 미술 활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예상보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교사인 내가 먼저 즐겁다 못해 기대감이 높아진 상태에서 시작할 때가 많았다. 물론 내가 그린 그림처럼 수업이 진행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해 내 수업 자체에 실망할 때도 있었다.
‘어느 모둠이 이렇게 목소리가 큰가요?’
‘자~ 목소리 좀 낮추자!’
‘계속 시끄럽게 하면 활동을 계속 할 수 없어요.’
처음의 마음이나 계획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활동 중 고조된 교실 분위기를 누르고자 나의 잔소리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 순간 교실에는 냉기가 돌고, 재미있게 적극 참여하던 학생들 역시 자발적인 참여 의지는 꺾일 때가 있었다.
‘우리가 활동하기 전에 했던 약속을 지켜주세요.’
활동 전 활동 방법 및 참여 태도 등을 약속을 하고, 그 약속에 어긋날 때면 이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리고 활동 정리 시, 오늘의 학습 내용 및 결과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도 또한 점검하고 반성하면 좋겠다. 단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1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학기 초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 교사도 그리고 학생도 노력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조금 더 나아진 우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