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 아저씨'의 미친 존재감!
‘아저씨!!!’
이런 아저씨라면 매일 부르고 싶다.
하지만 또지 엄마로서 먼저 떠올리는 ‘아저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런 모습이 않을까?
날씨 좋은 봄날, 또지 그리고 또지의 친구 모녀와 함께 근교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중에 또지 친구가 밥을 안 먹겠다고 생떼를 부리는데, 엄마의 한 마디로 상황이 종료되는 신세계를 보았다.
아이는 숟가락을 향해 작은 입을 쑤욱 내밀어 엄마가 내민 밥을 덥썩 받아 먹었다. 그 한 마디는 바로,
‘이놈 아저씨 온다~~~!’
이 한 문장에 존재하는 각종 비언어적 혹은 반언어적 표현을 오롯이 전할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아이를 양육해본 경험이 있다면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아이의 행동이 바로 바뀌는 것을 본 순간,
‘오, 마이 지져스!!! 이것이구나!!!’
요즘 LTE급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또지덕분에 매일매일 새로운 즐거움과 신선한 충격을 받을 때가 많다. 특히, 터무니없는 자기주장, 아니 똥고집을 부릴 때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없어진다. 이럴 때 매력적인 그 이름, '이놈 아저씨'를 기똥차게 불러보겠노라 다짐하며 여행에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또지가 낮잠을 자지 않고 버텼다. 그 순간 이놈 아저씨가 떠올랐다.
'또지, 안 자면 이놈 아저씨 불러온다!!!'
한껏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더니 또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장난만 치던 아이가 몸이 경직된 채로 눈을 억지로 꼭 감는 것이 아닌가?
‘오, 됐구나!’
효과를 본 나는 기뻤다.
착각이었다.
또지는 금새 내 품으로 들어와 나를 꽉 움켜 안았고, 감은 두 눈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놈 아저씨'에 대한 대단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또지는 그 자세 그대로 금새 잠들었고, 나는 생각이 깊어졌다.
'이놈 아저씨'
과연 아이의 말을 잘 듣도록 도와주는 엄마의 조력자일까?
사실 그 후에도 생각이나 느낌을 확실히 하고 싶어서 또지에게 의도적으로 몇 번 사용해봤다.
결론은 아니었다.
엄마는 친절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에 악역으로 '이놈 아저씨'를 소환하지만, 정작 아이가 무서워하는 사람을 부르는 나쁜 사람은 엄마이다.
또한, ‘이놈 아저씨’는 소리 지르기, 떼쓰기, 밥 먹기 등 행동을 ‘즉각적으로’ 멈추거나 식사 등을 해야할 때 등장한다. 즉, 상황이나 행동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 없이 '무조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조련받는 동물과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이놈 아저씨'의 효과가 급감, 아니 아예 없어질 것이다. 아이가 '이놈 아저씨'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고집은 더욱 세질지 모른다. 그때가 되어서는 엄마와 대화로 합의점을 찾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 있다. 아마 엄마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지 않았을까?
엄마와 아이의 생활 속의 약속을 '이놈 아저씨'의 힘을 빌려서 만든다면 당장은 행동으로 옮기는 속도가 빠르겠지만, 그 지속력은 강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도 나는 실수를 통해 깨닫고, 반성을 통해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