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그림책] #1 깊고 맑은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그림책
똑똑똑.
누구시죠?
이 문을 열어드리기 전에 먼저, 당신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글에 오신 게 맞는지 확인차 질문 몇 개를 드리도록 하죠.
1. 무언가에 감탄을 자주 하시나요?
2. 가끔은 턱을 괴고 아주 깊이 생각에 잠기시나요?
3. 문득,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요?
4. 아름다운 그림과 이슬처럼 빛나는 짧은 글을 사랑하실테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네 가지 질문에 모두 '네.' 라고 대답하시는군요!
좋아요. 잘 찾아오셨어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좋겠군요.
그래요, 사실 저도 그림책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어요. 멋진 그림책을 만날 때마다 돌멩이로 표시를 해 두었지만, 어느새 돌아서면 비 온 후 대나무 순처럼 근사한 그림책은 계속 무럭무럭 생겨나더군요. 길 잃은 차에 여기 잠시 머물고 있답니다.
당신도 길을 잃었다고요?
말 안 해도 사실 저는 알고 있었죠. 다리는 풀리고, 어깨는 잔뜩 뭉쳤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요. 찬 바람이 코트자락 사이로 들어오는 날씨니까요.
잠시 앉아 보세요. 그림책 한 권 보시겠어요. 이 그림책을 아주 천천히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쉬었다 가는거예요.
급할 것 없어요. 오히려 좀 쉬었다 다시 나서면 길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요. 따뜻한 홍차 한 잔 가져다 드릴게요.
첫 번째 그림책은 <100 인생 그림책>(하이케 팔러 글, 발레리오 비달리 그림)이에요.
당신은 그림책을 어떻게 읽는 사람인가요?
그래요, 차분한 마음으로 조용히 한 장씩 넘겨서 읽겠지요. 소리내진 않지만 또박또박 마음으로 소리내어.
아, 아이에게 소리내어 읽어주신다고요. 매일 밤, 그보다 충만한 시간은 없겠네요.
이 책은 보통 그림책과는 좀 달라요. 꽤 두껍지요. 얼마나 두껍냐고요? 무려 212쪽에 달합니다.
0세부터 100세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모든 나이에 두 쪽씩의 글과 그림이 주어지거든요.
저는 이 책으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건 아주 우연한 기회였어요. 가방에 이 책이 있는 걸 본 사람들이 책을 읽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중 한 명이 "소리내서 한 장씩 다 읽으면 어때?" 라고 말했어요.
그림책으로 100세 인생을 살아보기로 하고, 우리는 이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0세라니! 0세부터 시작하는군요. 막상 0세는 그 아이는 보이지도 않네요.
그렇다면 그 다음은 1세일까요?
0세
"난생 처음 네가 웃었지.
널 보는 이도 마주 웃었고."
아뇨. 0세와 1세 사이에는 아주 많은 날들이 있지요.
역시 아이 얼굴은 보이지도 않지만, 왜 이렇게 미소가 나는 걸까요.
1/2세
"손 가까이 있는 건 뭐든 붙잡는구나."
1세
"하지만 손에서 놓으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지.
그게 중력이라는 거야."
줄거리도 없고, 주인공도 없어요. 하지만 이 작가, 간단한 그림과 글로 우리를 사로잡는군요.
그렇다면 그 다음 나이는? 하면서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2세
"벌써 공중제비를 넘을 수 있니?
그래. 하지만 그렇게 네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드디어 귀여운 아이가 등장하였군요.
3세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도 알게 될 거야."
묘하게 앞장과 연결이 되는 듯, 안 되는 듯.
시 같은 글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혔다가, 또 뒤흔들기도 합니다.
8세
"네 자신을 점점 더 믿게 되겠지."
"내가 여덟살 때 저랬었나?" 함께 읽는 사람들이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기도 합니다.
짙은 푸른색 계열의 색연필이 아주 시원하게 다가오는군요.
26세
"너희는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하겠지.
아니면 안 그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까?"
처음으로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던 그 날 어딘지 모르게 상기돼 있던 내가 생각나는군요.
부끄러워 여태 말해 본 적 없는 기억이라고요? 왜요. 누구나 겪는 일인데요.
33세
"잠이 모자라도 버티는 법을 배우게 될거야."
이 페이지가 펼쳐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아! 하고 무릎을 쳤지요.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저도 함께 무릎을 쳤고요. 꼭 무엇을 겪어봐야만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우린 반쯤은 그렇게 느끼기도 해요.
43세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법도 배웠고."
어릴 땐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했죠.
하지만 나이 먹어가며 잠시 혼자 시간 보내며 짜릿해 할 줄도 알게 됩니다. 인생의 늦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면요.
58세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너무 어려워.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씩 "이제, 새로운 친구 사귈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공감이 가지 않아 맞장구를 쳐 주지 못했던 적이 있었지요.
글쎄요.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는, 새로운 친구를 얼마나 자주, 쉽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보다 나이가 더 많아지면요?
73세
"사는 동안 뭔가 다른 일을 해봤더라면 싶은 게 있니?"
이 페이지가 펼쳐지자 둘러앉아 이 그림책을 함께 읽던 사람들의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70대는 없었어요. 30대, 40대, 50대가 저 글과 그림에 그만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상태가 된 거예요.
"나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이대로 죽을까 두려워." 누군가가 말했지요.
저는 말로 저렇게 내뱉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다 못할까 조바심나는 마음을 숨기며 페이지를 계속 넘겼습니다.
92세
"죽음? 그래! 오고 있어."
이 페이지에서는 모두가 말이 없어졌습니다.
꼭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아도 우린 알 수 있잖아요.
그냥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요. 저 그림에는 저 문장이 딱이었어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함께 212쪽짜리 그림책을 함께 넘기며, 소리내서 읽는 건 다시 말하지만,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삶을 살아낸 듯한 아득한 기분이 들었고요.
책장을 넘기다가 "아, 잠시만. 앞 페이지로 돌아가 봐줘."라고 하길래, "왜요?" 했더니
"내 나이가 지금 52세거든. 52세 부분 다시 읽고 싶어." 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고 나니 저도 그만 궁금해져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제 나이의 페이지를 펼쳐
글과 그림을 읽어보았지요. 누가 내 삶을 엿봤나 싶을 정도로 딱 맞는 글이 적혀 있어서 화들짝 놀랐어요.
아, 이제 좀 혈색이 돌아오신 모양이네요. 한층 편안해 보이고요. 어때요, 쉬니까 좀 낫죠?
덕분에 고마웠어요. 제가 사랑하는 그림책을 함께 소리내어 읽게 되었네요.
인생은 이래서 걷잡을 수 없으며, 예측할 수 없이 행복해지기도 하는군요.
아뇨, 저는 좀 더 머물렀다 갈 생각이에요. 생각보다 그림책의 미로 속에서 헤매는 일이 즐겁기도 해서요.
마지막 인사요? 그러기엔 좀 일러요. 언제 또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요.
가시다가 책 속에 본 것 같은 민들레를 마주치면 저 대신 안부 좀 전해 주세요. 그래요, 조심히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