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창작은 처음입니다만] #9 내 밑천 팍팍 퍼주는 짜릿한 맛
2011년 겨울, 새로운 악기를 하나 만났다.
그 당시에만 해도 내가 이 악기를 배운다고 하면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뭐라고?”되묻는 사람이 더 많았다.
“있잖아 왜, 기타 닮았는데 사이즈는 좀 작은 거.” 라고 하면 그제서야 겨우 뭔지 알아듣는 낯선 악기.
바로 우쿨렐레였다.
(이 사진을 보고 반해, 정말 저 회사 우쿨렐레를 샀다!)
투명한 나일론 줄을 튕기면 통통 하는 상큼한 음색이 오렌지 과즙처럼 터져 나왔다.
소리만 들어도 야자수 아래 해변에서 하와이안 의상을 입고 우쿨렐레를 치는 음료수 광고 속 이효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밤을 꼴딱 새워가며 우쿨렐레를 치고 동호회엔 일주일에 5번씩 나갔다.
나는 우쿨렐레에 아주 깊이 퐁당, 빠져 들어버렸다.
우쿨렐레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보고 친구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재밌어? 나도 좀 가르쳐 주라.”
말 나온 김에 그 여세를 몰아 친구 세 명을 모아 하루짜리 우쿨렐레 깜짝 교실을 열었다.
악기도 작고, 주법도 어렵지 않아 배운지 두 시간 만에 다들 ‘곰 세 마리’ 한 곡 정도는 마스터하고 돌아갔다.
“내가 뭐랬어? 진짜 쉽댔지?” 노래 한 곡은 건졌다며 뿌듯해하는 친구들 표정을 보며, 오히려 내가 더 신이 났다.
나는 그때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쿨렐레 왕초보 탈출 무료 클래스를 여기저기서 열었다.
낯선 집에서 모르는 사람들 열 명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고, 공원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빈 교실에서 매주 같은 요일에 동료 선생님들한테도 우쿨렐레를 가르쳤다.
어느 순간 알았다.
내가 우쿨렐레라는 악기 자체보다 사람들에게 대가없이 우쿨렐레를 가르치는 일에 중독됐다는 것을.
여기, 무엇에 깊이 빠져 남에게 그걸 해주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또 있다.
테리 펜, 에릭 펜 형제의 그림책 <한밤의 정원사>다.
윌리엄은 음울하고 기운 없는 마을의 그림로치 보육원에 산다.
어느 날 아침,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윌리엄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칙칙하고 어두운 보육원 건물 앞에 있던 나무가 부엉이 모양으로 변해 있었던 거다!
놀라운 일은 다음날에도 벌어졌다. 고양이, 토끼 혹은 앵무새 모양의 나무가 마법처럼 짠하고 나타났다.
오늘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갖가지 동물 모양의 나무로.
날마다 선물처럼 나타나는 아름다운 나무 조각들의 향연. 나무 조각을 즐기기 위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웃음이 늘었고, 제각기 화사한 색의 옷을 차려입었다. 낡은 집을 고치고, 함께 모여 축제를 열였다.
밤늦게까지 축제를 즐기다 집에 가던 윌리엄은 낯선 할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사다리와 정원 가위를 들고 빙긋이 웃으며 뒤돌아보는, 그는 바로 한밤의 정원사였다.
내 우쿨렐레 무료 클래스는 나날이 번창했다.
그런데 더 이상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우쿨렐레에 미쳐 있었던 내가 교실에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도 악기를 꺼내 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악기 치는 내 모습을 보고 우리 반 아이들은 우쿨렐레 한 번 만져보고 싶어 안달을 했다. 그 눈빛들이 간절해, 결국 나는 학교 아이들을 모아 우쿨렐레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때부터는 어른들한테 우쿨렐레를 가르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남몰래 벅차오르는 순간이 예고 없이 자주 닥쳐왔다.
보드랍고 작은 손에 생긴 줄 자국을 보여주며“선생님! 손가락이 아픈데, 그래도 너무 즐거워요!”하던 아이의 빨개진 손끝을 문질러 주던 순간.
엄마 생신에 해 드린 축하 연주라며 동영상을 보여주는 아이의 웃는 옆모습을 살며시 지켜보는 순간.
자기가 만든 멜로디를 우쿨렐레로 연주해 주며“선생님, 혹시 지금 제가 한 게 작곡이에요?”하는 아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숨겼던 순간.
홀리듯 정원사 할아버지를 따라간 윌리엄은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 아래서 밤새도록 함께 나무를 다듬었다.
깜빡 잠들었던 윌리엄이 일어나 보니 할아버지는 온데간데없고 쪽지와 함께 정원 가위 하나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아름다운 나무 조각들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자 잎이 모조리 떨어져 버렸다.
윌리엄의 마을에 더 이상 한밤의 정원사는 나타나지 않지만 사람들에겐 환한 미소와 활기가 남았다.
4년 정도 우쿨렐레에 미쳐 있었던 나도 이젠 이런 저런 이유로 그때만큼 열정적으로 악기를 치지 않는다. 가끔 먼지를 털어내고 줄을 퉁겨 보곤 할 뿐이다.
어리석다 싶을 정도로 내 밑천을 팍팍 퍼 주고 다녔던 시절, 생각해보면 막 퍼줘서 가장 행복했던 건 나였다.
가끔 떠올려본다.
나와 함께 잠시라도 우쿨렐레를 쳤던 누군가가 자기 방에서, 공원에서, 바닷가에서 악기를 조용히 연주하는 모습을.
그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 한 곳이 간질간질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머릿속으로 앙큼한 계획을 짠다.
어떻게 하면 마구 퍼줄 수 있는지를 궁리하면서.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