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창작은 처음입니다만] #8 낯선 언어와 마주하기
길에서 만났던 여행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을 던져서 소중하게 받아온 대답들.
여덟번째 연재글을 준비하며 세어보니 무려 180명이었다.
그 중에서 무엇을 고르나.
차라리 몇 개 없었으면 모조리 소개할 수 있었을텐데. 고르느라 그 어느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몇 년이 지나도록 내 마음 어딘가에서 수런거리는 사랑의 언어들, 한 군데에 모아 보았다.
불가리아의 플로브디프라는 도시에서였다. 처음으로 Love project를 성공시키고서 좀 더 자신감이 붙은 내가 다음날 아침 게스트하우스에서 조식 주는 시간을 노렸다. 식
당으로 가니 식빵을 굽고, 시리얼에 우유를 붓는 여행자들이 만들어내는 상쾌한 활기가 가득했다.
나는 큰 테이블에 앉아 무심하고 느긋한 척을 했다. 마음으로는 간절하게 이야기할 새 친구를 기다리면서.
"여기 앉아도 될까?"
남자 셋이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응, 얼마든지."
"고마워. 어디서 왔니?"
"난 한국에서. 너희들은?"
"스페인!"
"아, 스페인."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세명에게 물었다.
"뭘 좀 물어봐도 될까?"
"물론이지."
"스페인엔 너네들처럼 잘생긴 애들 뿐이니?"
그 순간 테이블 위로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웃음으로 시작한 대화는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흘렀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깊어지자 나는 준비해갔던 한복모양 열쇠고리를 선물하며 그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선한 눈웃음으로 나를 무장해제시켰던 Vicente(첫 번째 사진의 친구)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썼다.
El amor es un cosquilloso que sientes dentro de ti cuando estas junto a la persona amada.
"사랑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갈 때 안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 같은 것."
(비센테. Varcelona, Spain)
쿠바에서 만난 파올라. 아들들이 어릴 때부터 친했던 아주머니 셋이 뭉쳐 여행을 왔다.
내가 여행에서 만난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체로 말이 많고 정도 많았다.
그녀는 귀여운 그림과 함께 이렇게 사랑을 정의했다.
Amore e dimenticare se stessi e dedicarsi agli altri.
사랑은 자신을 잊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파올라. Genova, Italia)
불가리아에서 만난 프랑스 사람, 안네 소피.
그녀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 법을 배우려고 자신의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일.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 결국 나 자신 또한 더욱 잘 사랑하게 된다."
(안네 소피. Torcy, France)
비행기에서 만난 중국 사람 한양봉.
비엔나 UN사무국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한양봉. Vienna, Austria)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만난 이스라엘 사람 이프타.
밤에도 아바나는 후덥지끈했고, 노천 카페에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우리는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면서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나, 이스라엘 글자 처음 봐!"
"나도 한국어를 보는 건 처음이야!"
"글자 뿐만이 아니잖아. 사람도."
"그래 사람도. 우리는 서로 첫 한국인, 첫 이스라엘인이네."
"그렇네. 영광이야!"
"나야말로."
이프타에게는 신분 격차 때문에 여자친구 집안에서 거절을 당했던 쓰린 기억이 있었고,
난 엄청난 과거를 숨기고 날 속여가면서 만났던 남자친구와 헤어진지 한달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둘이 동병상련이라며 위로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런 이프타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란 뭘까? 물건, 장소, 사람과 우리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프타. Israel)
비엔나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 키디를 만났다. 밝고 건강한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녀만의 사랑의 정의도 재치가 넘친다.
El amor es la sal de la vida. A que sabria la vida sin amor?
"사랑은 인생의 소금이다. 사랑없이 인생엔 무슨 맛이 날까?"
(키디, Vitoria, Spain)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만난 친구 루미. 도쿄에서 왔고,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고 했다.
까맣고 건강하게 타서 보는 사람만저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일본어가 짧아 군데군데 해석을 하지 못했다. 읽는 분 중 누군가가 번역을 해 주시면 기쁜 일이 될 것 같다.
"사랑이란..
(중략. 해석이 되는 분은 꼭 알려주세요.)
정말 사랑을 찾는 건 어려우니, 발견했다면 절대로 놓치지 마!"
(루미 오시마. Tokyo, Japan)
태국의 치앙다오 '샴발라 페스티벌' 에서 만난 영국 사람, 찰리 갓프리. 태국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가슴이 환해지는 미소. 그래서 그런지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했다.
바쁜 와중에도 자기 필통을 꺼내 굳이 색깔있는 펜을 꺼내서 예쁜 글씨 꾹꾹 눌러 이렇게 적었다.
Love is embracing people and nature around the world.
Respecting the way minds work, and learning to love every part of them.
Embracing the energy and finding a way to cue their woes.
"사랑은 온 세상의 사람과 자연을 끌어안는 것.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존중하고, 마음을 속속들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마음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아픔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찾는 일."
(찰리 갓프리, Stansted, England)
2011년 당시에 Love project 수첩에다 스페인 친구들이 사랑에 대해 적어줄 때만 해도 나는 스페인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내겐 완벽히 새로운 언어였고, 영어로 그들이 설명을 적어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외계어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내가 사진 한장에 미쳐 쿠바 여행 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거라는 것도, 쿠바가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라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5년이 지나 결국 홍 스페인어 학원을 드나들며 열정적으로 스페인어를 배우게 될 거라는 사실도 저땐 정말 몰랐다.
낯선 언어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지,
그 낯선 언어가 익숙해지는 순간은 그보다 훨씬 더 황홀한 일인지 이제는 안다.
한국어를 포함해 4개 정도 언어를 배우며 즐겁게 삶에서 부대끼고 있다.
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언어와 마주하게 될까.
한 번도 본 적 없고, 들어본 적 없는 언어와,
그 언어를 발음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 틈바구니에 언젠가 바람처럼 스며들기를 오늘도 소망하며.
ps. 외국 친구들이 "Jin, 너의 사랑은 무엇이야?"자꾸 물어서 나도 한 페이지에 적었다.
여행자들에게 내 글씨를 보여주면 "와, 한국어는 이렇게 생겼구나." 하며 신기해하는 표정들을 짓는다. 나는 그 순간을 무척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