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은 상대적이다
아이들과의 두 번째 면담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물어봅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무슨 직업을 가지고 싶냐, 고 묻는 것이 섣부르기도 하거니와 적절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터라, 이런 방향의 질문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만 하지만, 어쨌든, 아이들과의 두 번째 면담은 '장래희망이 무엇이니?'로 시작합니다.
이 아이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아직 초등학교 6학년의 아이들에게는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인지 모르게, '먼 미래'라는 말에 꽂혔습니다. 먼 미래.
이 아이가 자라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기 위한 본격적인 고민을 하는 것은 아마도 6~7년 쯤 뒤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진학할 과를 고르는 과정에서 해야할 일을 걱정하게 될테고,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스펙' 관리를 시작하면서 취업을 향해 쉴 새없이 줄달음치게 될 것입니다.
20년 가까이 된 일이지만, 1학년 후배들이 입학하자마자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강의를 수강한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란 것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민법총칙도 안 들은 아이들이, 리걸 마인드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사시를 준비한다고 하는 시대구나... 고작 한 학번 차이였지만,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6년에서 7년이라는 시간은 금새 지나가는 시간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가봅니다. 어르신들과 말씀 나누다보면, 내가 뭐뭐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라는 말씀을 하시는 장면을 볼 때가 있습니다.
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열 세 살, 초등학교 6학년을 보내던 시절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 머릿 속의 화면으로 재생되곤 합니다. 당시에 있었던 에피소드 모두가 기억나진 않지만, 조각조각 편린들이 띄엄띄엄 연결되면서 6학년 제 학창 시절의 총체로 다가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열 세 살 때의 저와, 그로부터 3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저 사이에는, 실은 어마어마어마한 일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간이 훌쩍 흐른 듯 싶다가도, 열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중고등학교 생활에, 평범하게 흘러갈 것만 같던 대학 생활, 그러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수능을 다시 보고, 다른 학교에 진학하고, 고시 공부 한답시고 껄쩍껄쩍 거리다가, 폭풍같은 취업 시즌을 보낸 뒤 취직, 그리고 정말 별 시덥잖은 이런저런 일들을 이리저리 해보다가 퇴사, 그리고 학원 강사 시절을 보내다가, 또 다른 학교에 입학, 그리고 이런저런 공부와 경험을 하다가, 임용시험을 치루고 합격, 그리고 아이들을 이렇게저렇게 만나는 경험까지. 무언가 간단하게 정리하기에는 참 별다른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화살같이 빠른데,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그 정도로 빠르지는 않은 것일까요.
생각해 본 바, 아마도 경험의 중첩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월화수목금은 같은 일상의 연속입니다. 출근해서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가 같이 점심 먹고, 오후 일 하다가 퇴근하면 집의 가족들을 보고, 다음 날 또 출근해서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가 같이 점심 먹고, 오후 일 하다가 퇴근하면 집의 가족들을 또 보고,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 삼주일을 지내다가, 불현듯, 9월 첫째주의 그 날은 뭘 하고 지냈지, 생각해보면, 닷새가 하루같은 것이죠. 특별할 것 없는 삶이 하루하루 쌓이지만, 그 쌓여나가는 것은 겹쳐서 그 폭과 양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집적되지 않고 중첩되어 버리는 일상.
아이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너에게 사회 생활은 먼 미래의 일일 수도 있지만, 너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미래는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네게 다가올 수도 있단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란다.
그렇다면 사람의 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단언컨대,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함께 지내는 관계.
지낸 시간들을 가만 돌이켜보면, 무언가 혼자 한 것이 기억을 풍요롭게 하는 일은 잘 없습니다. 내 추억의 나무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자양분. 그 열매들이 한 알 한 알 맺혀 내 마음 속 밭에 새로운 싹을 틔울 때, 그것이 내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고민은, 관계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학원에서 내 준 수학 숙제를 어떻게하면 더 잘 할 것인가 보다는, 나와 함께 지내는 아이들과 어떻게하면 추억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한 가지 팁.
선생님이 생각할 때, 흘러간 일은 다가올 일을 위해서 고민되어야 하는 것이지, 흘러간 일 자체를 부여잡고, 그 때 왜 그랬을까, 후회해봐야 아무 쓸모가 없단다.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는 말이 있단다.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생각보다는, 어떻게하면 다음 번에 물을 쏟지 않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지.
미묘하게 찾아드는 친구들에 대한 감정 때문에 항상 미묘하게 흔들거리는 이 아이에게, 친구들을 바라보는 지금의 태도는 놓지 않으면서도, 친구들을 대하는 마음은 과거의 무언가에 매이기보다 더 나은 관계를 위한 믿음과 도전으로 가꿈으로써 '먼 미래'에는 친구들의 가장 나은 친구로 성장할 수 있기를 응원하는 마음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