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사회] 03. 병자호란과 소중화사상
KimTe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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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4 11:09
지난 두 시간의 간략한 정리.
앞선 수업의 임진왜란이 조선 후기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를 추동하였고, 특히 대동법의 전면적인 시행을 통하여 사회 경제적인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면, 병자호란은 이후 조선 사회가 사상적으로 예학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며, 정치적인 반동의 흐름이 사회 변화를 강력하게 옭아매는 첫 시작점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생각해보자면, 중국 왕조의 흥망과 연결지어 볼 수 있습니다.
1368년 왕조를 개국한 명나라는, 2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왕조를 지속하면서 쇠퇴의 물길에 올라타 천천히 쇠망의 흐름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만주 지방의 여진족은 몽골과 명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그 세력을 천천히 확장시켜나가고 있었습니다.
본래 여진족은 다양한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던 바,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는 말갈족이라고도 불리어, 그 중 일부 부족은 고구려와 발해 시대 피지배층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시대에는 여진족이라고 통칭하여 불리기 시작하였고, 그 기세가 어마어마하여, 고려 중기 시대에는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의 송나라를 압박하여 남쪽으로 내어 쫓아내고 대륙의 북쪽 강역을 통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몽골의 거대한 위력에 대륙을 잃고 다시 만주로 쫓겨 올라가 근근히 부족을 유지하면서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서 때론 부딪치기도 하며, 때론 협력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조선 태조의 동북경영을 도운 이지란이 여진족 출신이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며, 함경도 북쪽의 경우에는 실제로 여진족이 부락을 이루고 거주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지금 함경도 쪽에 거주하는 분들 중에는 여진족의 혈통을 가진 분들도 있다고 하니, 고구려와 발해 시대부터 여진족 중 일부는 우리나라와 굉장히 가까운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명나라의 쇠퇴로 인하여 여진족이 세력을 외부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 시기와 맞물려 왜가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여진족을 감시하고 관리(!)하던 명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의 원군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여진족은 누르하치(청 태조)를 중심으로 부족 간 병합을 이루어 강력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여진족은 지속적으로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해 끊임없이 만리장성을 두드리고, 명나라는 이를 힘겹게 막아서는 일이 반복하여 벌어집니다.
흔히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이 쯤에서 이루어집니다. 1618년, 명나라는 조선 조정에 후금(청)의 공격을 막아서기 위한 원군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제조지은의 은혜를 입은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1만이 넘는 병력을 파견합니다.
이 때, 광해군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정세를 판단하여 소신껏 결정하라는 밀지를 내렸고, 강홍립은 후금과 짐짓 싸우다가 형세가 불리해지니까 병력을 들어 항복했다는 것이, 바로 광해군의 실리외교이자 중립외교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이에 대한 많은 이론(異論)이 존재하는 듯 하여 이를 확정하여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이론의 근거로 당시 조선 군병의 4분의 3이 사상을 입었다는 것을 들어, 과연 그렇게 많은 군병들을 잃었는데 과연 그것이 실리적인 결정이었겠는가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광해군이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내려온 후, 조선 조정은 더욱더 강력하게 친명배금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 첫 번째로, 인조반정이 광해군의 폐모살제, 즉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고작 여덟 살의 나이에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비윤리적인 행태로 몰아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윤리가 아닌 것을 다시 윤리로 돌리려는 것이 인조반정인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애매한 줄타기로 일관하는 광해군의 태도 또한 비윤리적인 것이므로 그것을 바로잡을 필요까지 새로운 조정의 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인조반정을 바라보는 명나라의 시선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인조반정을 그 당위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광해군을 원래의 왕위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굉장히 강력하게 펼쳐졌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후금과의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조선 조정을 강력하게 옭아매기 위하여 인조반정을 승인하는 것과 연계하였다고 하네요.
결국 조선 조정은 중화의 정수이자 핵심인 명나라를 강력하게 추종하면서, 후금과는 끝내 척을 지는 결정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게 됩니다. 어찌보면, 말을 갈아타야 할 시기를 놓쳤다고나 할까요. 명분론에 사로잡혀 주변 국가들의 흥망에 따라 국가에 이득이 되는 결정을 하지 못한, 요즘 용어로 이야기하면 외교에 완벽하게 실패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1627년의 정묘호란은, 이런 정세 속에서, 후금이 명나라를 침공하는데 있어 배후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조선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 격으로 이루어진 침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27년 초, 후금 군대는 전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 임금과 조선 조정은 북방 민족 침략으로부터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왔던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며, 적절한 시점에서 두 나라는 서로 형제의 예를 맺기로 - 후금이 형, 조선이 동생 - 약속하면서 전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만약 이 때 정묘호란을 통하여 실리적인 외교 정책의 필요성이라는 교훈을 얻었다면 적절한 명분과 적절한 실리를 함께 취할 수 있었을텐데, 정묘호란으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9년 뒤, 다시 후금의 말발굽 아래 조선 강토가 놓여지는 일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1636년의 병자호란은 그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양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전투는 배후에 적을 두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격전이 간혹 보이지만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 대부분의 전투는 배후에 적을 남겨두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도 아마 그와 같은 양상으로 전투가 이루어지리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청나라 군대는 농성하는 성을 하나씩 하나씩 허물며 올테니 성을 중심으로 방비하면서 임금과 조정은 강화도로 피란간 후 오랜 기간 전쟁을 치루면 아마 적을 퇴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국경을 넘자마자 방비성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전격적으로 도성 한양만을 목표로 하고 거침없이 남하하였습니다. 압록강을 건넌 후 도성 한양 앞에 서는데 걸린 시간은 단 열흘. 파발마가 청나라의 침공 소식을 전한 것이 도강 후 사흘 만이었고 그 후부터 대책을 논의하는 사이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평양, 개성을 그냥 지나쳐 그저 한양 도성만 바라보고 남하하였으니 한 마디로 허를 찔린 것이나 다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덕택에 강화도로의 피란이 막혀버린 인조와 조선 조정은 급히 세손과 종묘사직을 강화도로 피란시킨 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의 농성에 돌입하였습니다. 45일인 이유는, 남한산성에 비축되어있던 식량이 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을 에워싸고는 응원군으로 오는 군대를 하나씩 하나씩 물리치면서 그저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점령되고 종묘사직의 신주가 청나라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결국 45일간의 농성은 막을 내리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직접 참전한 청태종(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완전하게 항복하였습니다.
항복의 댓가는 어마어마하였습니다. 비록 왕실과 종묘사직은 지키게 되었지만, 인조의 큰아들인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후 효종)이 볼모로 잡혀가고 어마어마한 인원이 청나라의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척화파(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반대하는 파)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삼학사)를 청나라로 묶어가 처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은 청나라의 제후국(속국)이 되어 조공(세폐)을 바치고 때마다 신하를 보내 인사를 하는 등(사행)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심지어는 청나라가 명나라로 쳐들어갈 때 병력을 파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후 인조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철저하게 친청나라의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러나 중화주의에 강력하게 사로잡혀있던 식자층까지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끊임없는 북벌정책의 추진과 함께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하는 다양한 행동들이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8년 후인 1644년에 명나라는 멸망하였지만, 조선 왕조는 1704년에 창덕궁에 대보단을 설치하여 왕실 차원에서 명나라의 태조, 신종(만역력제), 의종(숭정제)를 제사지냅니다. 청나라에게 항복한지 50년이 갓 넘었을 뿐인 시기에, 청나라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던 조선에서, 왕궁의 한 쪽에 이제는 멸망한 왕조인 명나라의 임금을 기리는 제단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명나라가 얼마나 조선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효종과 숙종 대의 끊임없는 북벌정책의 추진과 논의는 이러한 영향력의 또 다른 증거입니다.
이러한 명나라의 영향은, 명나라가 고래로부터 계승해 온 '중화사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황오제시대부터 면면이 내려온, 실제로는 공자가 주창하고 주자(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의 질서는 꾸준하게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왕조의 통치 철학이 되어왔습니다. 조선 시대 성리학을 공부하던 학자들은 이러한 중국 대륙의 통치 철학을 중화사상의 정수로 인정하고, 자신들은 이를 계승하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소중화주의자들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인 청나라가 중화를 침범하게 되는데, 이제 중화의 정수를 계승해야 하는 것은 소중화를 자처하였던 조선이 되어야 할 것이며, 잘 보전하여 다시 중국 대륙에 중화의 꽃이 필 때 이를 전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조선의 식자층 사이에서 공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의 중화사상화는, 조선 후기 예학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커지는 원인이 되며, 이러한 명분론은 현종과 숙종 대의 세 차례의 환국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식자층이 명분론에 매이는 순간, 이제 명분이 아닌 것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고, 조선 후기의 강력한 예법의 적용은 이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조선 중기까지의 균분상속은 조선 후기에 장자상속으로 일변하게 되고, 남여의 위상이 강력한 위계질서를 갖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명분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분론이 명분 이외의 것과 타협하지 못하고 이를 배척하면서, 조선 조정의 붕당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이런저런 논란 가운데에서도 공존하였던 붕당이, 고작해야 상복을 얼마간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로 인해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는 사이로 바뀌게 되고, 숙종 임금 같은 경우에는 환국을 통하여 송시열 같은 서인의 거두에게 사약을 내리는 등 이를 왕권 강화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병자호란 이후 100년간, 이러한 조정의 뒤없이 부딪히는 강력한 대립은 결국 영조 임금으로 하여금 탕평책을 들고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이나 양명학, 서학 등의 다양한 목소리가 배척된 것도, 이러한 조선 사회의 강력한 명분론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병자호란과 뒤이은 명나라의 멸망의 과정에서 조선 사회가 강력한 명분론에 휩쓸려 간 것은, 비록 병자호란과 명나라의 멸망이 조선 사회의 중화사상의 추종과 이에 따른 명분론의 강력한 영향력의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결과론적으로 병자호란이 조선 후기 사회의 경직된 사회 모습과, 뒤이은 가장 강력한 명분인 개인의 영달만을 꿈꾸는 세도정치의 발호의 모습을 가지고 온 원인행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사진이 리사이징되어, 잘 보이지가 않네요... @.@
[이 게시물은 편집장님에 의해 2018-05-22 23:58:06 자유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