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01
이 주제통합 프로그램을 설계하면서 가장 고민한 지점은, '누더기 옷'을 만들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학기 초 적응 프로그램으로 회자되는 많은 것들이, 그저 하나의 주제망 안에 한 두 차시의 활동들을 연결해 붙여놓은 것 같은 모양새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각각의 프로그램들은 다 그 나름대로 교실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만, 명색이 주제'통합' 프로그램이라면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진 모양새여야하지 않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기왕이면 성취기준에 잘 엉겨붙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2022개정 교육과정은 융통 교육과정이라고 하여 성취기준 및 교과에 굳이 연결하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근무하는 지역도 올해부터 융통 교육과정으로 교과 시수를 빼내어 별도의 교육과정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기왕이면 성취기준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따라서, 많은 주제 활동들을 나름의 경험을 토대로 고안하였습니다. 가령 마인드맵으로 나의 겉모습과 속내, 환경을 살펴보는 첫 활동은 주제통합 프로그램의 흐름과 관련 교과 성취기준 및 프로그램 흐름에 맞추어 '이런 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기본 생각을 토대로 '이런 식으로 해 보면 될까?' 하는 아이디어를 구현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보면 활동이 성근 부분도 있습니다. 매년, '너 알아보기' 활동을 위해 보드게임 딕싯 Dixit 을 활용하여 왔는데, 이 활동이 흐름에 딱 옮겨 붙는다는 생각이 잘 안 들었습니다. 올해는 이 활동을 빼고, 바로 '너 생각하기' 활동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교실의 교사는 꽤나 많은 '배움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움을 기획하고, 배움을 계획하며, 배움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배움을 운영하며, 배움을 환류하고, 배움을 반성하는 것까지. 이러한 배움의 경험은 배움의 관점을 만들게 되고, 배움의 경험을 새롭게 재조직합니다. 배움의 학생 환류 뿐만 아니라 배움의 자가 환류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교사가 할 일은, 프로그램을 도입해 보는 것이 아닌, 프로그램이 가진 효과성을 시뮬레이션 해 보고 이것이 과연 우리 교실에서 적절할지 가늠하여 조정한 후 교실 배움 상황으로 내 놓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는 자가 환류 및 반성은 교실 배움의 과정에서 필수적입니다.
운영하며 염두에 둔 부분은, 얼마나 잘 녹아들게 할 것인가, 였습니다. 하루 두 차시 정도를 주제통합 수업으로 편성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이 프로그램 운영 과정에 쫓기듯이 참여하기보다는, 하루에 한 활동 씩 차근차근 해 나갈 수 있도록 운영하였습니다.
많은 학년 초 적응 프로그램들이, 어린이들을 너무 몰아세우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이 간과하는 지점이, 바뀐 환경에 대한 어린이들의 적응도입니다. 특히 고학년의 경우, 품고 사는 성격이나 생각에 따라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시간과 방법이 점차 달라집니다. 그런데 1년에 한 번씩 새로운 환경과 관계망에 어린이들을 두면서,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적응 프로그램입니까.
더 나아가, 학년 시작하자마자 정하는 학급 규칙 같은 것도. 올해의 교실 배움과 생활이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의 교실 살이를 가늠하는 활동은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첫 날 자기 소개 시간 같은 것도. 여기저기 연수 다니다보면 첫 시간 아이스 브레이킹 프로그램과 함께 자기 소개 시간도 간단하게 갖곤 하는데, 잘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첫 소개하는 사람의 폼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처음 소개한 분이 이름, 나이, 취미, 특기, 사는 곳을 이야기하면, 그 다음 분들도 똑같은 폼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은 정보는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시간 때우기 같은 느낌의 관행적인 프로그램.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을 꽉 차 있는 새 학년 첫 주.
오히려, 적응 프로그램을 천천히 펼쳐가면서, 여러 교과를 담당하는 교사의 배움 방향을 천천히 보여주며 새 학년 첫 달을 적응하여 간다면, 바뀐 환경과 관계에 어린이들이 천천히 적응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학년 초 적응 과정에서 교과를 고려하지 않는 점은 아쉬운 점입니다. 교실 살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배움입니다. 교실 살이와 규칙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배움을 뒷받침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교사가 교실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고학년이라면, 배움에 대한 교사의 철학과 관점입니다.
더 나아가, 예컨대 MBTI 같은 경험 과학적 프로그램을, 그나마 전문가의 안내나 코칭도 없이 누구의 손에 의해 간추려진지도 모르는 약식 과정이 학년 초 시간 때우기 용으로 투입되는 것에 큰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누구나 변화의 시간을 살아가게 되는데, MBTI 같은 프로그램이 오히려 어린이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부적 효과 - 스티그마 효과 - 를 불러오면서 부정적 변화 기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2007 개정 교육과정 실과 검정 교과서에 MBTI가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이니셜 소개가 아니라, 어린이 눈높이에 맞는 명칭으로 컨버젼되어 그 특징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더랬고, 저의 경우에는 '자신과 맞다고 생각하는 진술 세 개를 골라보라', '자신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진술을 모둠원들에게 하나씩 골라보게 하라'는 방식으로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열 여섯 개의 선택지 중에 여섯 개를 골라들기도 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고 살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제통합 프로그램 후속으로, 올해는 두 가지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학토재 감정 카드를 활용한 활동입니다. 감정 카드 중에 어린이들의 감정을 설명하는데 적절해 보이는 감정카드 약 40여 장을 메모꽂이 스탠드에 세운 후, 등교길에 그 날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감정카드를 자리로 가지고 들어가 책상에 두고 하루를 보내게 하는 활동입니다.
혹시 우울하거나 슬픈 일을 겪은 어린이들을 되돌아볼 수 있으며, 기쁘거나 즐거운 일을 겪은 어린이들과 이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줄 것입니다. 이에 대한 후기는 자세히 두드려 볼까 합니다.
두 번째로는, 함께 가져야 할 마음가짐 결정한 것을 바탕으로 교실 살이 시스템을 만들고 실행할 것입니다. '너 생각하기' 활동과 '너 다짐하기' 활동을 한 어린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함께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모둠 별로 정하고 이를 캐치프레이즈로 제안합니다. 어찌보면 이는 교실의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교실 살이의 가치와 방향을 설명하는. 이를 사회 교과의 '민주주의와 정치'와 연계하여, 교실 살이의 가치와 방향을 토대로 학급 규칙을 어린이들 스스로 만들고 실행하며 판정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1년 내내 운영해보고자 합니다. 이 또한 다른 글에서 더 소개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학년, 새로운 교실 살이가 시작됩니다. 2022학년도에는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설레이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 적응 프로그램으로, 조금 더 의미있는 관계망을 열어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