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사회] 1. 조선후기 05 잘사는 평민들이 만드는 문화
KimTe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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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5 22:00
조선 후기 사회 변화상 중 가장 괄목하게 드러나는 것은, 부유한 평민 계층이 구성되기 시작하고, 이들이 기존에 존재하던 문화 양태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재구성하여 낸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설시조를 들 수 있습니다. 본디 시조는 엄격한 율격의 형식을 갖추어 이를 만족시키면서 창작되던 문학 장르이며, 율격의 변화를 주더라도 이는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주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사회로 오면서 율격의 파괴와 파격이 도드라지는 사설시조가 등장하게 됩니다.
형식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바로 사설시조의 주인이었습니다. 기존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유학의 질서와는 크게 상관 없으면서도, 문화 생활을 향유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가진 부유한 평민들 또는 전문직으로서 부를 축적해가던 중인들이 이러한 파괴와 파격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딴엔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의 구질서는 벌써 임진왜란이라는 대격변과 함께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병자호란과 명나라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조선 후기 사회는 구질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예와 의식은 더 형식화되어 강화되고, 그러한 질서 아래 공고하게 자리잡은 계층은 이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존에는 홀대받고 천대받던 계층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물질적인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굳이 기존에 유지되어오던 예와 의식을 애써 따라가기 보다는 자신이 누리기 좋은대로 자유롭게 문화 생활의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한 편으로는, 양반 계층의 양극화도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양반이라는 계층은 벼슬을 한 사람만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벼슬을 한 조상을 둔 사람들까지를 모두 일컫는, 즉 하나의 계층을 일컫는 보통명사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조상이 벼슬을 했다고 해서 후손도 벼슬을 하라는 법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벼슬은 하지 못하면서 벼슬한 조상을 두었기 때문에 갖추어야 하는 예와 의식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양반이라는 계층에 묶여 그냥 몰락해가는 이들도 생겨나게 됩니다. 이를 잔반이라고 일컬으며, 끊임없이 벼슬을 대물림해가는 이들과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생활의 수준은 몰락해갑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양반전'이 이러한 몰락 양반과 신흥 부자인 평민이 처한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결국 부유한 평민들, 그리고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며 신분제의 공고한 형식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중인 계층은, 공고하게 굳어진 예를 배우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사용하기로 합니다. 사설시조가 그렇고, 다양한 그림들이 그렇습니다.
교과(용 도)서에는 평민들이 향유하던 문화 생활의 한 예로 민화 혹은 문자도 같은 그림들을 이야기합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굳어진 화풍에 의존한 그림들만 생산해내다가, 조선 후기로 오면 소비하는 계층의 필요에 맞춘 그림들이 등장하고 실제로 소비되기 시작합니다. 어찌보면, 레디-메이드 현상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더 많은 수의 평민 계층에 소비되기 시작한 문화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공고한 형식미에서 벗어나 소비층의 기호와 구미에 맞추어 자유롭게 변주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조선 후기 다양한 문화 상품의 등장은, 이를 소비할 수 있을만큼의 능력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 등장하되, 그들이 따로 형식에 매일 필요가 없는 계층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 생활의 향유를 통하여, 계층 간 연대 의식이 강화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계층 간의 질서를 허물려는 다양한 시도로 이어져야 하는데, 조선 사회는 그렇게 되지 못한 까닭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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