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사] 3. 특별한 기다림
저는 11년 동안 대학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 긴 기간, 제 대학생활을 지탱한 것은 개인과외였습니다.
첫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인 2월, 그저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좋아서 주변에 아는 아이들을 모은 후 월 10만원짜리 과외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금새 현실이 삶을 덮쳤고, 집의 도움을 받기 쉽잖았던 제게 과외는 학비이자 생활을 위한 투잡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한참일 때는, 7교시 수업을 마치자마자 지하철역으로 달려가서 5시 과외 집에 도착한 후, 두 시간 수업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대강 삼각김밥으로 때우며 7시 과외에 조금 늦게 가고, 연이어 9시 과외, 11시 과외까지 마친 후, 새벽 1시에 집에 들어가는 길에 심야 분식집에서 떡볶이에 순대 사 먹으며 하루를 마치는 것을 일상으로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잘 가르치는 과외 강사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과외했던 학생 중에, 예고를 다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용을 전공했던 이 학생은, 매일 학교에서 실기하고, 따로 레슨도 받으면서 몸을 혹사하였고, 그래서 저와 과외하는 시간에는 항상 피곤해하며 졸기 일쑤였습니다. 깨워도 보고, 혼내도 보고, 놔둬도 보았지만, 결국 이를 관리하지 못했었죠. 아마도, 돈값을 해야한다는 생각과, 학생을 이해하고자하는 마음이 갈팡질팡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돈을 받으면서 일하니 어설프게 모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계속 과외를 이어가면서 학비내며 생활할 만큼은 벌었지만, 이 생활을 지속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교육은 결국 어느 순간에는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저는 제가 받는 돈과 제가 하는 값어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딜레마로 고민이 컸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시장가격’이 있는데, 제 학력과 경력에 받아야 하는 돈이 저는 항상 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외가 그렇습니다. 어느 하나가 잘 되면 그 하나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는데, 보통 그 이후는 되는 경우도,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 된 그 하나가 보통은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스타일에 맞는 학생이 우연히 강사와 연결된 것이고, 그 덕택에 학생의 결과가 나오면 이는 전적으로 강사의 역량으로 잘 포장되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도 학생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포장된 강사의 역량은, 그 이후 좋지 않은 결과에도 면죄부가 됩니다. 훌륭한 강사 밑에서 왜 그것 밖에 못하냐는. 아이들 탓이 되는 셈이죠. 실은 바꾸어 봐야하는데 말입니다. 잘 하면 열심히 따라준 학생 덕, 못하면 학생을 충분히 케어하지 못한 강사 탓.
그래서 저는, 요즘 학원들이 주로 하는 레벨테스트에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이는 변수를 줄이겠다는 학원의 꼼수이니까요. 잘 하는 학생만 선별해 받으면 어떻게 결과가 안 나오겠습니까. 그리고는 눈속임이 일어납니다. 학원이 잘하는 것이다라는. 학생들이 갖도록 하기 가장 어려운, '하고자 하는 마음가짐(또는 관성적으로 해 나가는 상태)'이 이미 주어진 상황이라면 변수는 확연히 줄어듭니다.
진짜 좋은 학원이려면, 동기 없는 학생에게 동기를 불어넣어주는 일을 할 수 있으면 됩니다. 만약 학원에 가기 전에는 무기력하던 아이가, 학원에 다니면서 스스로 하기 시작하면서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학원을 높이 평가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앞서 두드린대로 그 학원이 반드시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만들어 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원만 잘 해준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도 잘 해야지요. 혹시 학생이 잘 한다면, 그저 모든 것이 학원 덕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학원도, 아이들도, 모두 열심히 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저는 강사가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동기가 제한적이라는 것 때문에 항상 큰 딜레마를 겪었습니다. 그저 잘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학생에게 동기가 없어 무기력한 것을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도하는 비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꽤 많은. 그런데 지도해도 학생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물론, 움직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강사로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근본적 이라기보다는 말초적이고 지엽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 때문에 항상 머뭇거렸습니다. 학생에게 긍정적인 동기를 주는 근본적인 방법은 시간이 필요하고 신뢰의 관계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움직이는 강사, 그것도 고작해야 대학생 신분으로 과외하는 처지에 섣불리 그걸 시도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래서 제가 좋은 강사가 되지 못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은 나쁘지 않게 벌었지만, 이건 제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직장 생활의 시작과 함께 이 일을 끝냈습니다.
(물론, 직장 생활을 끝내면서, 어쩔 수 없이 학원 일도 좀 하고, 교대를 다니면서 개인 지도를 통해 가장 노롯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도 결국 강사로 일하는 것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일을 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했고, 잘 가르쳤다 생각은 하지만...)
그래서, 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제가 맡은 학생들을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켜보면서 그 학생들과 신뢰관계를 구축해 갈 수 있었다는 지점입니다.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커리큘럼을 실행해 나가면서, 그 과정에서 제 반 학생들과 다양한 관계망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은 교사가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직에 입문한 후로 계속 6학년 담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아래 학년 학생들에게는, 경험적으로 교사인 제 말과 모습이 아이들에게 동기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적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시킬 수는 있겠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 이렇게 하렴. 그런데 제 성향은 그런 방식의 접근을 좋아하지 않는 듯 싶습니다. 저부터도, '정말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야?'라는 의심과 회의가 끊이지 않으니까요. 만약 저·중학년 학생들에게, 교사인 제 고민과 생각을 함께 이야기 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면... 그건 못할 짓이겠지요. 그래서 동료 교사들이 제 수업을 지켜보면서, 많이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등에 어울릴 수업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내는 저와의 생활이 좋은 동기가 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학교 교육에 참여하면서 가장 보람된 일이 그런 것입니다. 교육과정 상의 성취기준에 따른 배움에 더하여, 배움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 마음가짐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함께 지내는 학생들의 생각이 자라고 변하는 것을 보는 것.
6학년 과학 전담 교사 1년의 경험이 유일한 '6학년 담임교사' 이외의 제 교직경력인데, 그 때의 학생들이 과학 시간을 좋아하고 기다려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과학의 배움을 과학적 사고의 힘을 깨닫는 시간으로 보내고자 하는 교사의 의도에 많은 학생들이 즐겁게 참여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제 노력과 시도들이, 어떤 어린이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제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2015년에 담임하였던 A는, 누가 봐도 초등학생 남자 어린이였습니다. 그 해는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시기였는데, A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런 어린이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와의 수업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습니다. 독서감상글은 항상 간단하고 쉬운 책을 읽고 썼으며, 주제일기는 무언가 자신의 생각을 쓰기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저 나열하는 정도의 글이었습니다.
그 때 아마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던 듯 싶습니다. 모든 아이에게 배움이 가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제게, A는 제 수업과는 별로 큰 상관이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피아제의 발달 이론에 대해 배운 것을 실제 교실에서 되돌아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피아제는, 평균적으로 열 두 살에 구체적 조작기를 넘어서서 형식적 조작기로 접어든다고 보고하였습니다. 피아제의 열 두 살은, 우리나라에서는 열 세 살,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들의 나이입니다. 그리고, 발달에는 격차가 있으니,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사이에 어린이들은 구체적 조작기를 넘어서 형식적 조작기로 접어든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제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남자 어린이는 형식적 조작기에 접어드는 시점을 조금 더 늦춰보아도 좋을 듯 싶습니다. 네. 저는 아마도 중학교 2학년 1학기 어느 시점에선가 어린이를 벗고 청소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확신합니다.
A를 보면서, 모든 아이에게 배움이 가 닿아야하지만, 가 닿는 배움은 조금씩 다를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 보게 되었습니다. 제 어릴 적 모습을 반추하며, 아동 발달 이론을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반 모든 아이들이 모두 같은 배움에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수학 교과 시간에 특히 절감하곤 합니다. 교사가 가르쳤으니 학생들은 다 배워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교사가 확고하게 움켜쥐고 있습니다. 이는 어린이들이 가진 발달의 격차, 개인의 차이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획일화된 방식입니다.
저도 아마, 그런 선생님들을 만났으면, 그런 부모님을 만났으면, 아마 지속적인 투입 속에서 도달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실패 때문에 쉽게 포기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예순 두 명의 어린이들을 모두 다 케어하기에는 조금 벅차하셨으며, 부모님께서는 자신의 삶도 벅차 우리들을 세세하게 케어하실 수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과 선생님의 무관심이, 오히려 제가 실패할 기회를 앗아가버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실패에 무지한 채 시도하였고, 꽤 나쁘지 않은 결과들을 계속 얻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책임감의 방향은 달라져야 합니다. 저는 이 때부터 어린이들을 방과후에 남겨서 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2018년을 마지막으로, 방과후에 어린이들을 남기는 때는 보드게임 등을 하면서 놀 때 같은 경우로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공부'가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에게도 실패감만 더하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사의 책임감이 어린이들의 학습 역량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 방향에서 어린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가늠하고 스스로의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전하도록 안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배움이 활동으로만 이루어져서는 안되지만, 모든 배움이 활동을 배제한 것으로 이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활동이 무엇입니까. 학생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시도하여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배움 없는 활동을 보거나, 활동 없는 배움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활동은,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성취감에 도달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사가 획일적으로 긋는 성취감의 수준이 아닌.
학생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적절한 때에 도달할 때까지, 교사와 부모는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학생들이 지속적인 성공 경험을 맛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제안하고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도사수과음미체영실. 전통적인 초등학교 교과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교과 편성에 대한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과의 변화 방향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지만, 상당수는 교사가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교사가 전문가이니 교사의 생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어린이들이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배울 수 있는 것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느끼는 성취감과 배움에 대한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어린이들은 교사가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배움에 대한 어린이들의 성취감인양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초등학교 역사 일제강점기를 배울 때 관련 영화가 수업 시간에 투입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그 영화를 어린이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 속에 배움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영화보다 더 효과적이면서 어린이들을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배움의 성취감이 더 실제적인 무언가는 없을까요?
교사는 어린이들의 발달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어린이들의 시간을 제각기의 성취감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성취감은 물론, 어린이들의 역량이 성장할 수 있는, 배움으로부터 와야겠지요.
그렇게 교사의 기다림은, 특별한 것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