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
6학년 1학기 사회 2단원에서는, 우리나라 현대사 중 민주화 과정을 첫머리에 놓으면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에 대한 배움 과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세 시간에 걸쳐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을 강의식으로 안내하였습니다. 학생 주도적인 수업도 가능하겠지만, 꼭 알고 넘어갔으면 하는 내용이 꽤 많아 교사 주도적인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성취기준
[6사05-01] 4·19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해 온 과정을 파악한다.
[6사05-02] 광복 이후 시민의 정치 참여 활동이 확대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발전상을 살펴본다.
본론: 도대체 민주주의가 뭐길래?
현대사에 대한 안내는 1952년의 발췌개헌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헌법을 만들 때 대통령 선출 방식은 의원내각제 방식이 가미된 간선제였습니다. 제헌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의원들이 뽑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1948년 5·10총선에서 뽑힌 198명의 제헌의원(2명은 제주 4·3항쟁의 영향으로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한 제주도의 국회의원)이 제헌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하였습니다. 그 때 선출된 대통령이 바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입니다.
우리나라 제헌헌법 상에는 대통령의 임기를 4년, 1회 중임을 허용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2대 대통령 선거는 1952년에 국회의원들에 의해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첫 임기가 진행되는 동안, 굉장히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국회의 구성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의원들로 많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6·25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통령 재선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그 부하들은 - 정상적으로는 자유당이라는 당명을 쓰는 것이 맞지만, 아이들이 이 모든 것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간단하게 표현하였습니다 - 헌법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국회로 등원하던 반대편 국회의원들을 납치·감금한 후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를 우리 헌정사에서는 '발췌개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발췌개헌안의 내용은, 다른 헌법 상의 조항은 그대로 둔 채, 대통령을 국회에서 뽑던 것을 직선제, 즉 국민의 손으로 뽑는 것으로 바꾼 것 뿐입니다. 즉, 대통령의 연임을 위한 헌법의 개정일 뿐이었습니다. 직선제로 뽑을 경우 이승만 대통령에게 유리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 중이라 다른 정치 세력이 자신의 공약이나 정책을 홍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현임인 이승만 대통령이 후광효과를 누리는 것이죠. 그렇게 이승만 대통령은 2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런데 1954년에 이르러 이승만 대통령과 그 부하들은 새로운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여전히 대통령에게 1회 중임을 허용할 뿐이라, 이제 이승만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더 이상 대통령 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또 한 번의 헌법 개정이었습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을 시도한 것입니다.
지금은 헌법 개정을 위하여 국민투표의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지만, 당시에는 국회의원 재적의 3분의 2가 찬성하면 헌법을 개정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의 수는 203명. 이에 대한 3분의 2선은 135.3333······ 이므로 136명의 찬성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헌법 개정안의 국회 투표 결과는 재석 203명 중 135명 찬성. 표 결과가 참 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헌법 개정안은 부결 처리가 되었는데...
이 때 희대의 논리가 나옵니다. 사사오입.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3······ 이지만, 소수점 아래 4 이하는 버리고 5 이상이면 올려야하지 않느냐. 누가 사람을 쩜 3333······ 이렇게 헤아리느냐. 사람을 쪼갤 수도 없고... 그러니 소수점 아래는 버려서 3분의 2선을 135명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서울대 교수의 어거지 논리를 내세워, 부결 선포 다음 날 이를 번복하고 가결 선포를 합니다.
이렇게 이승만 대통령은 세 번째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을 억지로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런 무리수는 항상 그 반대급부가 따르는 법. 이렇게 시작된 1956년의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는 반대편 - 야당 - 의 신익희 후보가 굉장한 기세로 선거운동을 진행합니다. 이 때 유행했던 구호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 이런 구호가 도시를 중심으로 선풍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하였고, 세 번째 대통령 선거는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출마했던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후보, 조봉암 후보가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후보의 양자간 대결로 압축된 상황에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선거를 열흘 앞둔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유세를 위해 이동하는 도중에 뇌일혈로 돌아가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선거는 급격하게 이승만 대통령 쪽으로 기울게 되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나, 5백만 표를 얻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조봉암 후보가 2백만 표나 얻는 결과가 발생하였고, 또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뤄진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한 편인 이기붕 후보가, 반대편인 장면 후보에게 패하는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다음 네 번째 선거에서는 대통령이 되기 더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만드는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 그 부하들은 벌써부터 모략을 꾸미게 됩니다. 그것이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 후보에 대한 간첩 혐의였습니다. 조봉암 후보가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혐의와 함께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후, 결국 조봉암 후보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해 버린 일(1959년)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선거를 통해 유력한 정치인이 된 조봉암 후보가 다음 선거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아 버렸습니다.
다시 네 번째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고, 이번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출마한 가운데, 반대편에서는 조병옥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참 일이 기묘하여, 이번에도 조병옥 후보는 후보 등록을 마친 후 선거 운동을 준비하던 기간에, 그만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고, 이승만 대통령만 단독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어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단독 후보인 이승만 대통령은 무조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본 그 부하들은, 이번에는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 후보의 당선을 목표로 불법·부정선거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3·15 부정선거로 알려진 1960년의 선거는 다양한 부정과 불법이 판을 치는 선거였습니다. 돈을 뿌리고, 선물을 뿌리는 일이 공공연히 이루어졌습니다. 꼭 반장선거를 하는데 친구들에게 피자를 사주고, 피시방비를 대신 내 주면서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3인조·5인조 투표도 유명합니다. 군대 같은 곳에서 사람을 세 사람, 다섯 사람 씩 묶은 후,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표를 검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합니다. 1번 후보를 찍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정선거가 자행된 것이죠. 심지어는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후보가 미리 기표되어 투입된 투표함이 실제 투표함과 바꿔치기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거 후 개표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후보 표가 너무 많이 나와서 득표율이 100%가 넘어갈 우려에, 득표율을 70~80% 정도로 조정하라는 명령이 정부로부터 나올 정도로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난 선거입니다.
결국 선거 당일인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 등에서 부정·불법 선거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지속적으로 항의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러던 4월 11일, 마산에서 시위 도중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부정·불법 선거 규탄 시위를 벌인 후 학교로 귀교하던 도중 정치깡패 들에게 테러당한 이후, 다음 날인 4월 19일에는 약 10만명 정도의 대학생, 중·고등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대통령 하야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게 되고, 게엄령 - 평상시 경찰이 수행하던 치안·질서유지 등을 군인들이 수행하도록 하는 명령 - 의 발효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4월 25일 서울대 교수들의 시위가 마침표가 되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선언과 함께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 미국 하와이(!)로 떠나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 곳에서 살게 됩니다.
4·19 혁명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매년 4월 19일 대신, 4월 18일에 기념 행사를 가집니다(지금도 가지는지는 모르겠네요). '4·18 구국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없어진) 본관 앞 대운동장에서 기념 행사를 가진 후, 수유리 4·19 묘소 (지금은 국립4·19민주묘지)까지 약 8km 정도의 거리를 뛰어서 참배 다녀오는 행사를 매년 참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4·19 혁명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시위의 주체가 평범한 시민, 그 중에서도 특히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었다는 점입니다. 4·19국립묘지에 모셔진 희생자들도 다 평범하게 살던 분들인데, 불법과 부정 앞에서 분연히 일어서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200여 분이 조금 안되는 희생자 중에는 만 11세 국민학생도 있었던 만큼, 부정과 불법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특별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닌, 국민 모두의 목소리였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출국으로 마무리 된 4·19 혁명은, 국민의 손에 의한 새로운 민주적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1년을 갓 넘긴 1961년 5월 16일, 일단의 군인들이 총부리를 민주 정부를 향해 겨누는 일이 발생합니다. 주동자는 박정희 소장과 육군 8기 출신의 군인들.
제가 학생 시절에는 4·19를 의거 - 의로운 거사 - 요, 5·16을 혁명이라고 배웠습니다. 지금은 4·19를 혁명으로, 5·16은 군사정변으로 부르는 것이 학교 역사 과목에서의 서술 방식입니다.
어떤 민주주의도 군인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정부 - 즉 국민의 직접·보통·비밀·평등 선거로 뽑힌 - 를 뒤엎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바, 군인에게 허락된 무력은 국민과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를 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16이 혁명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같은 궤변으로 불법 행위가 합리화·정당화 된다면 권력이 시민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18년 동안의 불법적 권력 행위 이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평가로 갈음하게 되었지만, 전두환·노태우 씨에게 대법원에서 내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을 참고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5·16 군사정변으로 민주 정부를 몰아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하여 군정을 시작한 박정희 소장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도록 다시 헌법이 개정된 후인 1963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됩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상태에서 치뤄진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전 대통령보다 조금 더 많은 득표를 올려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67년 선거에서도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런데,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닥쳤던 문제가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닥칩니다. 바로 개정되었던 헌법이, 이승만 전 대통령 같은 독재를 막기 위해 대통령 임기를 4년, 1번에 한해 중임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선거에도 출마하여 대통령에 또 당선되고 싶었던 것이죠.
이는 1969년의 삼선개헌의 원인이 됩니다. 삼선개헌이 비판받는 이유는, 본회의장에서 개헌 표결을 하지 않고, 반대편 의원들을 따돌린 채 다른 장소에서 심야에 몰래 회의를 개최한 후 개헌안을 가결시킨 완전한 날치기 개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세 번째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선거에 출마하였고, 김대중 후보와의 선거에서 승리하여 세 번째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상대편 후보인 김대중 후보에게 큰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표 차이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 후보는 당시 40대의 젊은 후보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세 번째 선거 이후에 조봉암 후보를 간첩죄로 몰아 사형을 집행하고, 이후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처럼, 박정희 대통령도 자신의 대통령 직을 위하여 특별한 조치를 시행합니다. 바로 1972년, 유신 헌법으로의 개정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그 부하들은 아예 헌법을 바꾸어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대통령 직에 있을 수 있도록 제도를 꾸몄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유신 헌법은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하였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은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선출하였으나, 정부에서 출마자를 직·간접적으로 간섭함으로써 보통은 정부에 가까운, 대통령 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렇게 뽑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단독으로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 후보에 대해 전체 2,359명 중 2,357명의 찬성을 통해 대통령에 선출한 것을 보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해 뽑힌 국민의 대표자들이라고 할 수 없으며, 비민주적인 절차로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대통령 직에 있도록 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유신 헌법이 허락한 긴급조치권입니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긴급조치를 발효하도록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결국,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 규정한 헌법의 위에, 헌법보다 더 큰 긴급조치라는 권리를 대통령에게 부여함으로써,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으로 하여금 왕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가장 비민주적인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긴급조치권은 총 9번에 걸쳐 선포되었으며,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긴급조치 관련 사건으로는 긴급조치 제4호에 의한 인민혁명당 사건이었습니다. 총 36명이 간첩 사건 - 민청학련 사건 - 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 끝에 3심에서 8명에게 사형 선고가 이루어지고, 선고 다음 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해버린 사건으로, 지금은 정부 - 중앙정보부 - 에 의한 조작으로 밝혀져 재심 끝에 사형당한 8명에게 무죄가 최종 선고되었습니다.
비록 무죄로 결론이 났지만, 누군가의 남편이자 자녀요, 아버지였던 여덟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사법 절차를 다 거쳤음에도 결국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 사건은 지금도 '사법 살인'으로 회자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남편과 자식,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은 유가족은, 이후 몇 십 년 동안 간첩의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 연좌제 - 을 당하면서 취업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모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비록 재심 끝에 최종 무죄 판결이 났고,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금으로 유가족에게 27~33억이 지급되었지만, 어찌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그 마음과 억울하게 당한 수십년간의 고통의 시간을 그깟 금액으로 배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유신 헌법 아래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그 부하들은 민주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채,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가로막아가면서, 계속 YH사건과 부마항쟁 같은 일을 쌓아갔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가수와 대학생을 불러놓고 술파티를 벌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함께 하였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서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10·26 사태는 18년의 장기독재가 갑작스럽게 종료되면서, 국민들로 하여금 국민이 국가의 주인되는 민주화의 열망을 부채질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일단의 군인들이 계속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개입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12·12 군사반란의 원인이 됩니다. 이후 전두환·노태우 씨에게 1심에서는 각각 사형 및 징역 22년 6월의 선고, 최종심에서는 각각 무기징역 및 징역 17년을 내리게 되는 이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대 내 권력 지향 사조직인 하나회에서, 자신들과 맞서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몰아내고 군 권력을 잡고 최종적으로는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군인들의 행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 때와 마찬가지로 군인이 허락되지 않은 권력으로 민주적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간섭하며 좌지우지하는, 민주주의에서는 허락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이에 맞서 많은 사람들은 민주적 절차에 의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목표로 활동하였고, 이를 '서울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1980년 5월 17일에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전국에 게엄령을 선포하게 되고, 이것은 5월 18일에 전라남도 광주 시민들의 반대 시위로 이어집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민주화 운동은, 5월 18일, 게엄령을 반대하며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여 잔인하게 제압하던 군인들에 반대하며 일반 시민들이 학생들에 합세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무자비한 폭력을 무차별하게 사용하던 군인들에 맞서, 학생과 시민도 무장하며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군인들의 폭력은 시위대만을 향하지 않았으며, 어린이부터 시위와 무관한 학생, 어르신까지 무차별하게 이루어졌다는 증언들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결국 시민들이 군인들을 광주로부터 몰아내며 민주화의 불을 활활 태우는 듯 하였으나, 더 많은 군인들이 광주로 진입하여 5월 27일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광주 민주화 운동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뒤로 한 채 끝맺게 됩니다.
그 희생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한 마타도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폄하는, 당시 무도하게 굴던 반민주 세력이 아직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로, 이는 마땅히 바로잡아야 마땅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상조사가 계속 이루어지면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룬 광주 민주화 운동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가 되새겨지고 있습니다.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북한 세력을 추종하던 무리에 의한 투쟁도 아니요, 어떤 정치인들의 사주나 명령에 단순하게 복종하여 벌인 투쟁도 아닌, 민주화를 열망하던 평범한 학생들과 시민들에 벌어진 민주화 운동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들어 둔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의해서 7년 단임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고, 재임 내내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함성에 시달리게 됩니다.
1987년 1월, 결국 민주화를 바라던 한 청년은 정부의 무도한 행위에 의해 희생당하게 됩니다. 대학생 박종철 학생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자신의 선배를 하숙집에 머물게 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연행당해 물고문을 당하다가 그만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더라'는 희대의 망언을 낳은 이 안타까운 희생은, 당시 박종철 학생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불려갔던 한 의사의 양심선언으로 만천하에 밝혀지고, 시민들의 민주화를 위한 열망은 조금씩 고조됩니다.
그러던 중에, 전두환 씨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당시 헌법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어 두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을 뽑는 방식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임기만 7년, 한 번으로 바뀐 채 계속되던 비민주적 방식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호헌조치의 내용으로, 이는 자신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에게 대통령 직을 넘기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더 적극적으로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였고, 그러던 와중에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직격으로 맞아 뇌사상태에 빠지면서 민주화 시위는 불이 붙게 됩니다. 결국 다음 날인 6월 10일부터 시위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6월 민주 항쟁
백만명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평범한 넥타이 부대까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열망을 외쳤던 6월의 시위는, 결국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씨가 모든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는 방식으로 개헌을 약속하면서 - 6·29 선언 - 민주화를 열망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뜻이 실현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연세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면, 지금은 인도로 탈바꿈한 백양로가 본관의 언더우드 상까지 쭈욱 이어집니다. 조금 걷다보면 왼쪽으로는 공학관과 공과대학 건물이 지나가고, 오른쪽으로는 세브란스 병원 건물이 조금 떨어져서 보이다가 백주년 기념관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백주년 기념관을 지나면 안쪽으로 연세대학교 탄생지인 한옥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 앞쪽에 약간의 둔덕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나무 조금 있는 언덕에, 이한열 동산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돌비가 하나 있었는데, 이번 2월에 가서 보니 깔끔하게 정돈한 이한열 열사 기념비가 마련되어 있어 그 의미를 잘 새겨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한열 동상을 볼 때마다 항상, 저건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새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는데, 이번에 정돈된 것을 보면서 이제 이한열 열사의 희생이 조금은 더 의미있게 새겨진 듯 해서 감동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개정된 제 9차 개정 헌법의 경우, 학계나 정치권에서는 87년 체제라 이름하며 이제는 그 효용이 다한 바 새로운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 속에 지금까지 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논의는 초등학생들에게는 부적절하겠지만, 다만 이렇게 이어진 민주화 과정, 그리고 세 가지 중요한 상징적인 사건을 대하면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사건들이다.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시켜가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는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는 1단원의 조선 후기사와 일제강점기 치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내내 강조해왔던 바이가도 합니다.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흘러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단원의 현대사 부분에서도, 초점이 평범한 사람들의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결정임을 확인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공부할 사회과 2단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배워 볼 핵심 주제는,
민주주의가 무엇이길래 평범한 사람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참여했는가
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