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보다 필요한 것은, 안전에 대한 공론의 장과 구체적인 대비
사고는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비하여 지침을 마련하고, 구성원이 이를 숙지하여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고 발생 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으려면, 평소 응급상황 발생을 가정하고 담당자/구성원들이 구체적으로 동선을 확인하고, 반복적으로 훈련을 해야 한다.
다시 정리한다.
예상 가능한 사고의 목록 작성, 현장의 위험도 점검, 사례 공유, 실습, 훈련, 지침의 갱신.
야구 경기 중, 사고가 일어났다.
지난 5월 17일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 이승헌이 경기 중 타구에 머리를 맞는 불의의 부상을 입었다. 빠르고 강력한 타구에 투수가 머리를 맞는 것은 예상할 수 없는 사고이나 사고 이후의 대처는 걱정스러웠다. 전문 의료진이 적절하고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화 구단 측의 설명에 따르면 심판 확인 후 구급차 호출, 응급 구조자의 상태 확인, 구급차의 응급처치 및 후송이 총 3분 이내 이루어져야 하는 매뉴얼에 따랐기에 문제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실제 중계 영상을 보면 3분 20초가 걸렸다고 하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심판의 거듭된 호출에도 보이지 않는가 하면, 두부에 충격이 있는 환자를 목 보호대나 들것 없이 손으로 들어서 옮기는 장면이 그대로 중계되었다는 점이다. 2000년 임수혁 선수의 경기 중 심장마비가 발생하였을 때 초동 대처가 미흡하여 투병 끝에 결국 사망한 사고 이후로, 경기장 내 응급 시스템이 정비 및 개선된 바가 있다. 그렇지만 아직 현장에서는 응급상황을 가정한 역할분담, 훈련, 전문 인력 배치 등이 철저하지 못하였음이 느껴진다.
(참고 자료 : 이준목, ‘롯데 이승헌의 부상, 응급대처 ‘비난’ 왜 나왔나’, 오마이뉴스, 2020. 5. 18)
이승헌 선수는 치료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미세 골절과 뇌출혈로 회복 중에 있다고 한다.
사고가 없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쾌유를 빈다.
학교. 안전. 징후. 그리고 우리는
불의의 사고를 보며 떠오른 것은, 바로 학교였다.
미성년 학생들이 움직이고,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고, 마주치고, 상호작용을 하는 곳. 개별 보호자와 함께하기 어려우니 보호의 책임이 교직원에게 위임되는 곳.
과연 학교는 잘 대비하고 있는가? 과연 사고가 일어났을 때 안심할 수 있는 곳인가?
초・중등학교는 의무교육기관으로, 학생들은 학교에서 최소 4시간, 학령이 높아질수록 머무는 시간은 더욱 길어지게 된다. 교직원은 법정 8시간 근무. 물론 이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물며 일한다.
교육기본법 제 17조의 5 및 학교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에 관한 법률 2조 6항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학생 및 교직원의 안전을 보장하고 사고(교육활동 중에 발생한 안전사고, 급식을 비롯한 질병 등)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시책을 수립, 실시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재난 대비, 전염병 예방,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시행령을 마련하고 매년 학교에서는 학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법정 시간만큼 교육 및 훈련을 진행하고, 이를 준수하였는지 보고하고 있다.
동법 시행령에서 규정하는 학교안전교육은 다음과 같다.
특히 재난안전교육, 응급처치 교육은 1회 이상 실습을 통해 대비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우왕좌왕하지 않고, 1분 1초를 허비하지 않고 최적화된 동선을 따라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예견되는 위험에 대해 함께 말하고 정말 잘, 대비했으면
하인리히 법칙은 '징후'에 주목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학교는 징후를 포착하는 데 민감하지 않다.
문제가 되지 않도록, 수많은 지침을 숙지하여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조치를 하고, 이를 문서화하여 보고하는 것은 말 그대로 최소한일 뿐.
불안을 느끼는 학생, 교직원, 학부모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끼는지 확인한다거나, 대피 혹은 환자 이송을 수시로 연습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
교육 자료에서 본, 학생들에게 재난 대비 훈련을 불시에 실시하는 나라의 영상 속 학생들이 차분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러울 뿐이다.
이래서 걱정이 된다, 라고 말하면서도 유난스럽거나, 현실을 모르거나, 결국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설레발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애쓰게 된다.
수습이 아니라 대비를 위해, 공식적으로 안전을 의제로 논의하는 공론의 장이 과연 형성될 수 있을 것인지.
교육 당국, 지자체에서는 지침(매뉴얼)을 보강하여 빠르게 제시하는 것 외에도 학생 및 교직원에게 닥칠 위험을 예견하고, 이에 대한 방침(통일된 정책의 방향)을 제공해야 한다. 학교 내 대책반을 운영할 때 당사자들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 것처럼, 당국에서도 현장의 의견을 듣고 협의를 통해 공통의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발표가 나기만을 기다리다가, 문맥을 따져 가며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고, 문서화하고, 세워 놓은 대책이 다시 뒤집어지고 하는 과정에서, 집행을 해야 하는 학교 현장에서는 구성원들과대책을 세울 여유도, 자리잡을 시간도 확보하기 매우 어렵다.
학교에서 학생을 보호할 책임은 학교의 장에게 있다. 불의의 사고에 대해 학교와 교직원이 예견 가능한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였으며 학생을 보호, 감독할 주의의무를 다했다면 그를 넘어서는 책임은 면책할 것을 천명함으로써 학교에서 안심하고 교육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전례 없는 개학연기, 온라인 개학을 겪고 나서 이제 등교 개학을 앞두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전염병에 맞서 학생들을 지키고, 안전하게 교육활동을 펼치고 싶은 마음은 보호자뿐만 아니라 교직원의 소망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위험을 감지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면서도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는데, 당국에서 올드 노멀 - 기존의 규정 - 에 얽매여 있거나, 중장기적 방향을 제시하는 대신 개학을 하는가 마는가, 등교를 할까 말까 초단기적으로 발표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다. 등교 방법, 급식 시행 방법, 비대면 수업에 있어 결정을 개별 학교의 몫으로 넘겨 보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학교에서 결정을 내리면 책임의 소재는 학교, 교직원의 몫이 되기에, 학교가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학교의 구성원들이 허심탄회하게 위험을 예견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충분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안전한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은 바로 학생과 교직원의 안전을 최우선에 둔 장기적이면서도 선제적인 정책 방향의 제시이다. 부디 코앞으로 다가온 초중등 학생들의 등교가 안전하게 이루어지고, 보호자와 교직원의 불안감도 낮출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