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살림] 네 마음에 선생님은 어떻게 남아 있니?
3시에 조퇴를 신청하고 칼같이 나오고 싶었지만 금요일에는 기안 올릴 것이 여럿.
이것만, 이것만 하다가 30분이 흘렀나보다.
3시 30분은 중학생들이 집에 가는 시간. 지하철 역 근처에 여중여고가 있다.
바쁘게 걷던 중이었지만 길을 오가다 몇 번 봤었는데 날 못 알아보던 이어폰을 낀 채 지나가는 첫 제자를 보고 씩~ 웃으며 ㅇㅈ아 안녕~ 인사했다. (이름이 기억나서 다행이다. 명찰 보니 맞았네.)
그러더니 아이가 너무 반가워하면서 선생님!!! 한다.
예전에 나는 너 몇 번 봤다고 말할까 하다 꿀꺽 삼키고, 선생님 기억나? 물었다.
그럼요~ 선생님이 달콤이도 주고 우리 보고 막 밤톨이라고 그러고~ 너무 행복해졌다.
그래, 첫 담임 시절, 너희들이 내 첫 밤톨이들이었단다. 지금도 난 그대로 하고 있는걸.
옛 제자 중에 찾아와준 녀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스승의 날이나 다른 날에도 제자들과 짜장면도 먹고 떡볶이도 먹는데 우리 반에 들른 아이들은 고개 쑥 내밀고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곧 가볼게요~ 했었다.
내가 아이들 마음에 닿지 못했나보다 생각했는데 바로 한 조각을 떠올려 주다니 너무 기뻤다.
선생님은 지금 몇반이에요?
응 나 3학년 3반.
오~ 나는 3학년 때 3반 아니었는데. 우리 5학년 4반이었잖아요. (5-4인건 기억이 잘 안나는데;;;)
너 그럼 중2인가?
에~ 3학년이에요.
아 미안. 벌써 5년 전인가.
지금 시험 기간이에요. 이제 고등학교도 가는데.
와~ 곧 고등학생이네! 꼬맹이였는데 키도 많이 크고.
ㅎㅎ 그 때보다야 한참 컸죠.
선생님 찾아와. 기다릴게.
네~ 작년에 갔는데 어딘줄 몰랐어요.
그랬어? 올해 안에 꼭 와.
내년에 갈게요.
ㅎㅎ 내년에는 어디 있을 줄 알고.
에이~ 선생님 어디 안 가잖아요~
글쎄다. 사람 일이란. 시험 잘 쳐. 화이팅.
네~ 안녕히 가세요.
웃음이 삐식삐식 새어나왔다. 와 첫제자 만났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타다다당 소리가 들리더니 누가 선생님!! 부른다.
오잉! 녀석이랑 같은 반, 회장이었던 친구.
선생님!!! 선생님 목소리가 들려서 되돌아왔어요. 잘 지내세요?
어머나 어머나. 반가워! 엄마랑 동생은 몇 번 봤는데, 너도 진짜 많이 컸다~
아빠가 크셔서 저도 계속 커요.
모델해도 되겠다 얘. ㅎㅎ
지난 번에 갔는데 선생님 회의중이셨는데.
어 그랬어? 몰랐어. 얼굴 봤으면 좋았을 걸. 시험 끝나면 꼭 놀러와.
네 그럴게요. 시험 잘 치고, 또 보자. 잘가!
세상에. 두 번이나 이런 반가운 만남이 있다니.
정류장에 거의 다가오자, 스마트폰을 보며 걷는 체육복 차림의 여학생.
작년 졸업생이다.
안녕!
어어??
잘 지내? 시험기간이야?
아니요. 언니들만요.
오랜만이다.
네.
한 번 찾아오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예?? 예...
그럼 잘 가.
아직 작년 아이들은 추억 보정이 덜 되었나보다.
첫 담임이 5학년이라 내 제자로 안 남을 줄 알았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가끔 보았던 것 같다.
지난 달에 자기 유학간다고 수업 중에 불쑥 찾아왔었는데.
걸걸한 목소리로 앞문에 서서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그래서 5교시 수업중이던 우리 반 아이들이 누구에요 선생님?? 형아다 형아 그랬었지.
인사만 하러 왔다고 바로 가버려서 언제 간다고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갔을 것 같다.
올 스승의 날에도 ㅁㅈ이가 입술에 빨간 틴트를 바르고 찾아와서 입술 색도 신경쓰고 왔네 했었는데.
어머 선생님 제 이름 기억해요? 놀라더니만. 다시 돌아와서는 인사도 너무 짧게 드렸다고 커피 기프티콘을 보내 주었던 적이 있었다.
얘들이 벌써 이렇게 컸나 놀랐었다.
ㄱ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발표할 때 힘들어하길래 마이크를 몇 번 빌려와서 토론 수행평가랑 학급회의를 했었다. 속상한데 말로 못하겠다고 눈물 흘려서 상담도 했었는데. 2학기에 부회장에 나가더니 회의도 작은 목소리로 진행하고. 발표도 작은 목소리지만 끝까지 해서 놀랐었다. 그 아이도 교복 입고 세 번인가 찾아왔었다.
얼굴은 선한데, 이름은 가물가물. 아직 중학생이라 초등학생 시절 얼굴은 남아있다. 골똘히 생각하면 이름도 떠오르고. 일년 내내 같이 점심을 먹고, 이름을 부르고, 일기나 독서록에도 댓글을 달던 사이라 그런지 집중해 보면 아이마다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아이마다 인상깊은 장면이 몇은 있다.
내가 신경썼던 부분, 신경써도 풀리지 않던 부분, 신경 안썼어도 술술 잘해내던 부분. 신경 쓰여서 부모님과 상담했던 부분.
시간이 흐르고 그 때의 아이는 달라져 있다.
자기 나름의 해결법을 찾았거나, 여러 방법을 찾아 보았거나. 이미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서 어느새 잊었을지도.
첫 제자를 온전히 일 년 동안 가르치면서 내게 생긴 버릇들도 있고, 이벤트도 있고, 감이 생겼다.
행동 패턴, 나의 대처 방법이 특정 유형으로 분류되어 지금 학생들을 비춰 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 때 어떻게 대처했었는지가 다음에 만나는 학생들을 대하는 기본값이 된다.
제자들이 교사인 나에게 흔적을 남긴 것이다.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좋은 경험만 남을 수는 없겠지만, 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3학년 때를 회상할 때 선생님이 신경을 썼던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남다른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순간 몇 장면이 떠오를 수 있기를.
기왕이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오늘도 내가 수양하고, 표정과 말투를 다듬으며 지내야 겠다고 생각한다.
같은 말이라도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어쩌면 이것이 아이들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년에 마주칠 우리 반 아이들이 기꺼이 선생님과 인사 나누고 싶어지도록.
오늘도 마음을 닦고 궁리해 보는 나.
교사가 애를 쓰던 장면을 문득 떠올려 줄, 성장하는 중인 어린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지치더라도 나가 떨어져 놓아버리기 전에 잠시만 쉬었다가 다시 나대로 교육해 보자고 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