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들2] #2. 익숙함과 징글징글함에 대하여
익숙함이란 당신에 대한 이해와 다름 아니다.
당신을 알고 받아들이기까지 같이 보낸 시간을, 요동치던 감정이 잦아들던 순간들을, 낯섦과 호기심, 놀람과 황당을 수십 번 거쳤던 나날들.
반복하여 만나며 알게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
지금, 이곳만 보며 지낸 3월. 갑자기 어려진 우리 밤톨이들. 아이들 이름도 잘 안 외워지고, 영 우리 반 같지도 않고 영 아직 우리 애들 같지 않은 생각이 드는 기간. 처음부터 알려 주고 만들어야 하는 규칙, 방법들을 하나하나 미션 클리어하던 중.
“선생님 쫓아가다 쫓 어떻게 써요?” - (쫓아가다를 쓰며) 받침은 치읓이에요.
“선생님 칠판에 쫓아가다 왜 써 있어요?” - ㅇㅊ이가 말해서 쓴 건데... 헷갈리는 낱말은 선생님이 칠판에 며칠 써두겠다고 했는데...
“선생님 우유 이렇게 뜯어요?” - 그렇게 뜯으라고 눈앞에서 보여 줬는데...
“선생님 일기장 오늘 내도 돼요?” - 방금 전에 저 친구에게 말했는데... 내고 싶으면 내라고...
“선생님 알림장 꺼내야 해요?” - 책가방에서 필요한 것 싹 꺼내고 가방은 장에 넣어두라고 했는데... 그런데 아까 꺼내지 않았니?
“선생님 오늘 몇 모둠이 급식당번이에요?” - 우리 반은 5모둠이라 요일이 정해져 있는데... 벌써 네 번짼데...
“선생님 생각공책에 저거 다 써야 돼요?” - 핵심어만 써도 되고... 더 쓰고 싶으면 써도 되고...
“선생님 쟤가 선생님 종 쳤는데 그래도 돼요?” - 허락 받고 쳐야 된다는 거 너도 알잖아... 직접 말하지 그러니...
“선생님 저도 칠판 지워도 돼요?” - 싹싹이에게 도와줘도 되는지 물어보렴... 그런데 방금 안 된다고 했던 것 같던데... 나한테 허락 받으면 되는 거니...
3학년은 참 예쁘면서도 참 순수하면서도 참 어리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분명 3학년 학생들을 교과 전담도 해 보았고, 1학년도 가르쳐 보았었는데, 왜 이리 당황스럽지. 3학년 아이들은 아차, 이걸 모르는구나. 아, 아직 어려서 그렇구나, 아, 다시 말해줘야겠다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특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선택하라고 하면 참 곤란해 한다.
척 하면 척, 한 번 말하면 알아듣고, 왜 그래야 하느냐고, 꼭 그래야 하는 거냐고, 안하면 안 되냐고 묻긴 했지만 모르겠다는 말은 좀처럼 안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6학년 아이들. 처음에는 계속 물어보고 서툴렀었다. 공책 쓰는 법, 일기 쓰는 법, 글똥누기 쓰는 법, 시험 보는 방법, 청소 방법, 반성과 다짐 쓰는 법, 발표 방법... 규칙을 알고, 회의도 하고, 협상도 하고, 투표도 하고, 우기기도 하다가. 그러다가 어느덧 우리 선생님은 그래~ 하는 말을 하곤 했다. 나도 이 녀석은 그래, 우리 반 아이들은 그렇지~ 했었고. 그렇게 만나고 부대끼고 정을 떼었다 붙였다 하다가, 마지막에는 알맹이 선생님 사용설명서를 써 줄 정도로 익숙해졌다.
나도 그 아이들에게 익숙해졌구나. 참 빠르고도 기나긴 우리들의 일 년이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이었어.
익숙함이란 당신에 대한 이해와 다름 아니다. 당신을 알고 받아들이기까지 같이 보낸 시간을, 요동치던 감정이 잦아들던 순간들을, 낯섦과 호기심, 당황과 황당을 거쳐 온 나날. 반복적이고 셀 수 없는 짧지 않은 과정을 함축하는 말. 분명히 그 익숙함은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는 의미일 터다. 이해하기까지 인지하고, 맞닥뜨리고, 부딪치고,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나의 개념이 형성되고 발달한 궤적. 피아제님 오랜만입니다
생각해 보면 6학년도 3학년 시절이 있었을텐데 말이야. 3년의 시간 동안 너희들이 많은 것들을 익히고 익숙해져왔던 거였구나.
지금 3학년 아이들도, 연필을 바르게 쥐지 않아 글씨 쓸 때 힘이 많이 들어가긴 해도, 너희에겐 연필 잡는 법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 계셨었구나. 급식차를 옮기는 것도 아직 서툴지만 작년에 해 보아서 알게 되었구나. 독서록 쓰는 법을 알려 주신 선생님 덕에 별 말을 하지 않아도 척척 써오는구나. 공들여 가르치고, 확인하고 다시 가르치던 선생님들 덕에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나는 그렇게 아이와 만나 일 년을 보내며 그만큼을 알려 주는 선생님들 중 하나로구나. 그대의 성장 안에 내가 있고, 또 우리 동료 선생님들이 있는 것이구나. 아기 때부터 보호하고 길러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었지.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대가 자라는 과정에 함께 하며 영향을 주고 익숙해져 갈 것이야.
어느덧 새로 만난 아이들과의 시간도 한 달이 지나 과거가 되었다. 지난 한 달도 부족한 것, 놓친 것, 과한 것은 숱하며 의도가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준비한 게임을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해 설명하는 데 오래 걸려 결국 제대로 하지 못했다. 놀이를 하다 당황하여 울어버린 아이는 비슷한 방식의 게임은 안하겠다고 한다. 재미있는 과학을 빨리 배우고 싶은데 선생님은 왜 쉬운 것을 어렵게 빙빙 돌려서 가르치시나요, 하는 질문도 받았다. 올해도 여전히, 제 시간에 맞추어 끝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나도, 아이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알고 있어도 능숙하지가 못하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리셋의 기회가 있다.
매일 매 시간 달라진 모습으로 만날 때마다 다시 잘해보면 된다.
지금은 부족할지라도, 이미 지나가버렸다 해도, 일단 지금은 패스. 다음 기회를 보아 도전하자.
도전하고 성공하고 다시 도전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배우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아주 징글징글할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서야 서로를 알고 익숙해져 간다는 것을.
아이들도 내게, 나도 아이들에게 익숙해질 시간을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