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들]#5. 늘지 않는 독서기록장에 답하기
12월 말, “독서기록장 우수아를 선정해 주세요. 최우수 1명, 우수 8명 이내입니다.”라는 메시지가 온다. 동학년에서 40칸까지 스티커를 붙일 수 있도록 보내 주신 기록표에는 40칸을 넘긴 아이는 딱 한 명. 우리 반은 매주 월요일, 독서기록장 제출을 하는데 4월이 지나자 내는 녀석이 한둘 될까말까였다. 독서릴레이도 하고, 여름방학 때 방학과제로 주기도 하고, 틈틈이 알림장에 써 봤지만 독서기록장에 쓰는 것은 드물다. 옆 반 선생님은 매주 2회씩 독서기록장을 쓰게 하셨다고 했는데, 내가 너무 안 챙겨서 그런가 생각도 든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내라고 했는데 제출한 학생은 6명. 알림장에 이름 쓰고 닦달하니 15명이 냈다. 나머지 아이들은 끝까지 “어차피 상도 못 타고, 많이 쓰지도 않아서 창피하다”는 이유로 제출하지 않았다. 여름방학까지 96개를 써낸 녀석은 더 이상 늘지 않았고, 2학기에는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다. 마지노선을 정해 놓았는데 ㅅㅎ이는 그 선을 넘었지만 지레 자기가 안 받을 줄 알고 5일째 가져오지 않았고, ㄷㅎ이는 상을 받으러 나오면서도 “내가 이걸 왜 받지? 나 조금밖에 안 썼는데”라고 말했다. 순간 욱해서 “그럼 안 받을 거야?”라는 말이 나왔다. 작년에도, 그 전에도, 올해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찜찜한 독서기록장 시상이다.
의도와 속마음
#필수인데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닌
독서기록장은 모든 아이들이 한 권씩 받으며, 학교 예산을 들여 학교에 관한 만드는 기록장으로, 매년 내지 구성을 수정한다. 우리 학교는 앞부분에 학교의 상징, 우리 반, 인성교육, 예절교육, 학년 필수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줄넘기 급수, 칭찬스티커를 모으는 지면이 있고, 뒷부분은 다양한 방식으로 칸이 나뉘어져 있는 독서기록장으로 사용한다. 1~3학년용과 4~6학년용으로 나뉘어 있는데, 고학년은 독서토론(입론) 부분이 추가되어 있고 인상 깊은 장면 그리기 부분은 적다. 분명 학교에서 나누어 준 것이고, 시상도 하고, 창체 활동에 작성해 넣기도 하지만 꼭 해야 해요? 물어 보면 “도움이 될 테니 잘 활용해 봐.”라고 대답하게 된다. 누군가는 꼬박꼬박 기록하고 제출하지만 누군가는 넘겨보지도 않은 채로 다음 해 독서기록장을 받게 된다. 학교는 일단 주고, 담임은 알아서 검사하고, 가정에서는 나름대로 확인하고, 학생들은 때때로 쓴다.
#책을 읽고 나서 기록해야 하는 건가
상담을 할 때 아이의 여러 가지 면에 대해 듣지만 마지막은 독서 습관에 대해 묻는 편이다. 한 학부모님은 “책은 읽으라고 하는데 기록하라고 하지는 않아요. 써야 한다는 부담에 책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아예 책을 보는 것도 싫어하더라고요. 편하게 책을 꺼내 읽어야 하는데 읽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 감상 쓰는데 매달리느라 책과 멀어지게 둘 필요가 있을까요.” 라고 말씀하셨다. 주객이 전도될 필요는 없다. 책을 찾아 읽고, 독서를 좋아하고, 책 읽을 짬을 내어 꾸준히 책을 접하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 독서교육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감상과 정보를 기록하는 것은 내용의 이해 및 이후 회상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내 생각의 흐름을 보여주는 부표처럼.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되면서, 나중의 나에게 전하는 마음. 일기도, 공책 정리도, 필기도 같은 이유다. 제가 필기중독인 것을 감안해 주시길 문구덕후 예쁜 글씨에 집착함 시간이 흐르면 내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읽기 전, 읽기 중에도 얼마든지 메모할 수 있다. 감상문, 독서 일지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은 읽은 다음에 책 내용을 모두 떠올리고 요약하는 활동 자체를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을 찾아 오락적으로 읽다가 무엇을 감상해야 하는지 어려워하기도 하며, 곱씹어야 하는 책, 자신의 수준보다 높은 책을 앞부분만 읽다가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굳이 글로 감상을 정리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지금은 비주얼씽킹이 강조되고, 기록을 돕는 다양한 매체가 개발되고 있으니 전통적인 글쓰기 외에도 나름대로, 효과적인 방식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각자가 책을 읽는 법을 선택하게 되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적어도 어른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 줄뿐만 아니라 책을 다루고 활용하는 모습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 좀 읽어라.”, “독서감상문을 써라.”, “책에서 뭘 알게 되었니?” 보다 효과적인 것은 어른들이 읽은 책을 먼저 나누고, 자신의 감상과 기록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상을 주어야 하나
아이든 어른이든 평생학습 시대에서 독서의 습관을 강조하고 독서기록을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책을 많이 읽은 아이에게 상을 주어야 할까? 책을 ‘많이 읽은’ 아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 학교에서는 독서기록우수아와 함께 독서우수아를 시상하고 있는데, 학년별로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을 많이 한 학생’이 수상을 한다. 과학의 달, 독서의 달 행사로 ‘독서감상문 쓰기 대회’에서 독서와 감상문 짓기의 질적인 측면을 평가한다면 연말에는 누적된 양을 시상한다고 볼 수 있겠다.
상을 주려면, 기준이 있어야 하고, 반 안에서는 서열이, 학년 내에서는 균형이 필요하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상을 받을 기회가 많았으면, 그래서 골고루 받게 되기를 바라고, 열심히 노력해서 상을 받은 아이들은 노력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을 받을 정도만 하는’, ‘상을 받지 못한다면 굳이 애쓸 필요가 없는’, ‘상을 안 받았으니 나의 행동이 부족한 것이라고 느끼는’ 아이들이 생겨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특히 책에 몰입해서 읽는 아이, 다양한 책을 즐기고 도전하는 아이, 한두 편을 쓰더라도 책에 푹 빠져서 감상을 되새기는 아이들에 대한 격려는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독서기록장에 쓴 갯수만큼 스티커 붙이기
책을 읽고 나서 독서기록장을 펴고, 선생님이 읽을 것을 감안하여 또는 부모님이 뭐라 하시기도 하고 적당한 책을 적당한 내용으로 잔소리 예방을 위해 글씨도 또박또박 주어진 형식에 맞춰 쓰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가시적인 표시,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해 없어지지 않는 표지는 필요하다.
기록한 내용에 대해 댓글 달고 대화하기
학생들이 ‘기록해야겠다’ 마음먹은 데 대한 보답으로 무엇이 좋을까? 나는 가끔 댓글을 달아 준다. 인상깊은 장면을 꼽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역사/과학/소설 등 특정한 분야를 읽는 학생에게는 다른 분야를 추천하기도 하고, “감동적이었다/재미있었다”라고 쓴 친구에게는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주기도 한다. 반응은 거의 없지만, 읽은 책을 머금을 수 있도록, 다음에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책 읽고 나서 자유롭게 표시하기
누가 봐도 책을 자주 들고 다니는데, 책 읽은 이야기를 하는데, 기록하는 데는 영 취미가 없는 아이도 있다. 자신이 읽은 책의 권수를 표시하거나, 어떤 책을 읽었는지 제목을 나누는 등의 게시물을 통해 인정해 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독서 과제 내기
첫 담임을 맡았을 때 옆 반 선생님께서 알림장에 적어 주신 문구에 충격을 받았다. “30분 이상 가장 편한 자세로 좋아하는 책 읽기”. 그래서 그 뒤로 주말 알림장에 가끔 써준다. “바람을 맞으며 책 읽기”, “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 읽기”, “여행지에 책 들고 가기”처럼 책을 읽는 다양한 상황을 제시한다든가, 주제일기에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책”, “내가 책 속의 인물이 된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 “책 속의 인물에게 상 주기”처럼 책의 감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보도록 지도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즐겁게 기꺼이 꾸준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서감상 및 기록에 대해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관심을 표현하고 비법을 나누는 기회를 가진다면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