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들] #4. 오지 않는 공책을 기다리기
우리 반에서 사용하는 공책은 다섯 권이 있다. 일기장, 생각공책, 글똥누기, 수학공책, 오답공책. 전교생에게 배부된 독서기록장과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알림장을 합하면 총 7권의 개인공책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일기장, 알림장, 독서기록장은 당연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3월 첫 날 이미 빈 공책 2권을 준비해 알림장, 일기장을 만든 친구들이 다수다. 물론 꾸준히 쓰고 확인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생각공책, 글똥누기, 수학공책은 3월 첫날, 앞으로 우리 반에서 공부할 때 특별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밑밥을 깔아 주었다.
오답공책은 '해왔던 것' 이지만 잘하는 학생들은 뿌듯한 얼굴로 펼쳐 놓고, 성적이 낮은 학생들은 내놓고 싶지 않은 공책이다. 학기 초 아이들과 평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맞은 답을 적었다 하여 곧 자신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틀린 답을 적었다 하여 자신이 틀린 것은 아님을 꼭이야기해 준다. 평가하는 순간 내가 아는 것과 알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사진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틀린 답"을 명확히 다시 한 번 보면서 앞으로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오답공책 쓰는 법을 붙여 준다. 공책에 자신의 시험지를 붙이고, 오답을 찾아 이유와 함께 정답을 고쳐 적은 다음, 보호자의 확인을 받아서 부모님 꼭 도와주세요 아이가 모르면 집에서도 좀 알려 주세요 선생님에게 제출한다.
생각공책은 수업 들을 때 작성하고, 복습할 때 알게 된 것/궁금한 것/나의 생각을 적는다. 코넬 공책 형식으로, 3월에 3색 볼펜을 뇌물로 바쳐 환심을 사고 선물로 주고, 중요한 것은 빨간색으로 쓰고, 떠오른 생각이나 관련되어 궁금한 것은 푸른색으로 덧붙이라고 안내한다. 선생님이 칠판에 쓴 대로 중요한 것을 적어도 된다고 하고 선생님은 열심히 칠판 판서, ppt 게시, 핵심어에 강조를 한다. 얘들아 칠판에 선생님이 쓴 거, 두 번 말한 거는 중요하다는 느낌 안오니 다 쓰기 힘들면 중요한 낱말만 따라서 써 놓고 빨간 동그라미를 치거나 형광펜으로 다시 표시하라고 하였다. 고기잡는 방법을 가르쳐드릴게요
수학공책은 10칸 쓰기 공책을 사용하고, 칠판에 선생님이 쓴 대로 풀이과정을 따라 적거나, 줄 맞추어 연산하기, 자리를 눈여겨봐야 하는 큰 수 혹은 분수/소수 이해하기, 표그리기/그래프 그리기 등에 편리하여 사용하고 있다. 수학 시간에는 수학공책을 한 번씩은 활용하는 활동을 한다.
특히 글똥누기 공책은 미리 직접 아이들의 이름을 적고 첫 선물로 뇌물로 바쳐 환심을 사고22 나누어 주었다. 매일 여러분의 따끈따끈한 마음을 글로 적으면서 잔잔하고 맑은 샘에 얼굴 비추어 보듯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고. 글똥누기는 매일 받고 나누어주기에 편하도록 4종류(번호별 6명씩)를 샀다. 깔끔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긍정적인 캘리그라피, 귀여운 캐릭터 표지로 준비하였다. 공책 자체가 예뻐서 첫날 아이들이 받고 자기 이름과 알밤이 그려져 있으면 와~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다. 날짜, 날씨 빼고 3줄 이상씩 쓰기로 했고, 시쓰기를 하거나 주제를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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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글똥누기를 쓰고, 수업 중에 생각공책, 수학공책을 사용한 다음 복습할 때 활용하기로 안내하였다. 몇 번이고 안내하였다.
"아침에 오면 글똥누기부터 쓰세요." "선생님과 생각공책에 같이 씁시다." "수학공책에 문제를 내고 친구와 바꾸어 푸세요."
"지금 자리에 앉아서 쓰세요." "A는 글똥누기 쓰고 있네." "B모둠은 생각공책을 잘 쓰고 있군요. 참여점수 +1." "C야, 수학공책." "B모둠뿐만 아니라 다들 쓰고 있구나. 굿굿 베리굿~"
책상 위가 텅 빈 채 반쯤 뒤돌아 앉아서 "아~~ 글똥누기 왜 써야 되냐~ 야야 너 썼냐? 어 쟤 쓰고 있네." 말하는 D. 그리고 E. 근처의 몇 아이들.
콕 짚어서 탈탈 털고 싶지만 꾹 참고 눈빛을 준다.
반 전체에게 "우리 반은 글똥누기/생각공책 꼭 씁니다. 선생님이 말하지 않아도 습관이 될 때까지 선생님은 계속 할 거예요."라고 말하며 쳐다 보지만 그래도 연필을 잡지 않고 있는 녀석들. 근처로 다가가서 눈빛을 다시 보낸다. "지금 뭐 하는 시간일까요."
급한 날은
"공책 제출하고 나서 교과실로 갑니다."(부산하게 꺼내오는 소리)
책상 속에 숨어 있고 사물함 속에, 가방 속에서 등장하는 공책들. 한 달 전, 두 달 전에 쓰고 펼치지 않았구나.
몇 명이 끝내 안 내고 중간놀이가 지나간다. 안 되겠다 싶어서
"오늘 제출 안 한 사람 남아서 쓰고 갑니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쓰는 아이 두서넛.
끝끝내 D는 하교 인사를 마치자마자 슬쩍 나간다.
"선생님!! D 튀었어요!!" "아 저도 학원 가야 되는데!""그래. 끝까지 마치고 가줘서 고마워."
의도와 속마음
공책을 활용했을 때 장점은 굉장히 많다.
본인에게는 메모하는 습관, 도식화하거나 요약하는 능력, 기록하며 메타인지자극, 다시 찾아볼 수 있는 복원지점을 생성, 훗날 돌아보면 당시의 나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
교사에게는 학습 분위기 형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하다.
반마다 20%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공책을 척척 꺼내어 쓰고, 매일 검사를 받으러 먼저 나온다.
50%는 아차! 하면서 쓰기 시작한다.
20%는 늘 잊어 버리고 잃어 버리고 하라고 얘기해야만 두세 줄 쓴다.
10%는 절대로 잊어 버리지도 잃어 버리지도 않았지만 절대로 하지 않는다.
매일, 매번 공책을 챙기고, 내용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하는 것은 교사인 나에게도 쉽지 않다. 어떤 날은 검사하고, 어떤 날은 넘어가게 되고. 어떤 날은 말하기가 싫어서 그냥 놔둔다.
공책쓰기를 강요로 느끼는 아이들과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올해 우리 반은 그 10%가 아주 굳건하다.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괴발개발 휘갈겨 써놓은 공책을 보면서 애썼다, 말해주기는 하지만 내 기대보다 느리고, 아쉽기만 하다.
공책을 과연 꼭 써야만 하는 건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안 한다고 그만 두자니, 충분한 효과를 얻기도 전에 "졌다, 포기했다"는 패배감이 남을 것 같다.
아예 시작을 말았으면 모를까. 내년에는 하지 말까.
그래도 척척 쓰고 잘 활용하는 20%가 있는데. 50%는 그럭저럭 해내고 그럭저럭 만족하는데.
아침에 칠판에 "글똥누기, 교과서 준비, 우유 마시기, 제출하기"를 쓰면서도
부디 오늘은 아이들이 2분만, 5분만 투자해 주기를, 그래서 서로 시원하게 확인하고 확인 받고, 실랑이하며 힘겨루기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렇게
#처음에는 공동책임을 주려고 했다.
오답공책은 알림장에 쓰고, 부모님께 확인받기를 했다. 그러면 부모님도 확인하시고, 도와주실 것 같아서.
생각공책은 수업 중에 쓴 내용을 보고 알게된 점, 궁금한 점, 자신의 생각을 한 줄로 쓰고 나서 누군가에게 배운 것에 대해 설명을 하고 오는 것이 미션이었다. (주로 가족이 될 것으로 예상)
아이들이 공부하고 스스로 복습해서 부모님께 확인을 받으러 온 모습을 보면 부모님들이 반길 것 같았다. 자녀가 대충 한다면 같이 봐주실 수 있고, 자녀가 어려워하면 도와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아마도 틀렸던 것 같다. 아이가 부모님들에게 전하지 않은 적도 많고, 사인이나 숙제는 아이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시는 분들도 종종 계셨다. 자녀가 어려워한다 해도 부모님이 도와주기 어려울 수 있다. 자녀가 대충 하는데 이제 6학년이니까... 하면서 스스로 할 때까지 두고 보신다는 분들도 네다섯 분 계셨다. 6학년이라서? 아니면 그냥 우리 반에 그런 분들이 여럿 계셨던 것일까? 그것이 알고싶다 다음에 6학년을 맡기 전까지는 미스테리 꼭 6학년을 또 해야 아는 것은 아닐텐데 내년엔 몇학년 쓰지 ㅠ
글똥누기는 우리 반 모두가 아침에 하는 것이기에 하루의 이끔이가 글똥누기를 걷어 오도록 했다. 그러면 이끔이가 제출하라고 말해 주고 서로 쓰도록 하겠지. 그것은 나의 오산 내가 시켜도, 모둠 점수를 걸어도, 글똥누기는 개인의 것이었다. 점수 그까이꺼
#잘한 아이에게 칭찬을, 공책을 낸 아이에게 피드백을
꼬박꼬박 아침마다 글똥누기를 내는 ㅎㅇㄹ, ㅅㅈ, ㅎㄴ이가 고맙고 반가웠다. 꼬박꼬박 내고, 아침에 그것부터 하는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글똥누기에 대한 댓글을 달면 더 힘이 날까 싶어 때로는 아이보다 더 길게 써주기도 하였다.
오답공책을 내면 나아진 점에 대해 말해 주고, 어려워했던 문제를 풀기 위한 꿀팁 한 가지를 알려 주었다.
생각공책을 내면 알궁나를 읽어보고 생각을 넓혀 주거나 오개념을 바로 잡아 주는 한 마디를 나누었다.
좋아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나름 1:1의 만남이 이루어져서 교육적이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었지만
벅찼다. 글똥누기에 댓글을 적어주기도, 오답공책을 쓸 수 있도록 단원평가지에 한두 줄 적어주는 것도 힘들었다.
길게 줄 서는 동안 떠들고. 글똥누기 걷기, 오답공책 걷기, 생각공책 검사, 알림장 검사... 공책검사에도 시간이 걸려서 그냥 넘어가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안 내는 녀석들은 끝까지 버텼다.
#전문가의 조언
올해 12월 7일, 서울·경기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이영근 선생님의 '글똥누기'를 주제로 겨울공부방을 열었다. 당장 그 날에도 아침에 D는 들으라는 듯이 아~~~ 대체 왜 우리 반은 글똥누기를 써야 하냐? 꼭 해야 되는 것도 아닌데~~~ 를 세 번쯤 외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쓰고 나서 그렇게 말을 하면 또 몰라
이영근 선생님의 반에서도 아이들 서넛은 시간을 넘긴다고 한다. 그래도 머리 싸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신다고 하셨다.
마치 내 마음을 읽으신 것 마냥 "공책 걷어놓고 댓글 써주려 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분주한 하루에 선생님도 지치십니다. 오자마자 쓰고, 쓰자마자 선생님과 나누도록 하세요. 선생님도 바로 반응하고, 아이가 떠올린 것을 함께 나누고, 사진으로도 남겨 보세요." 라고 강의를 하셨다.
사실 댓글을 써 줄 때 같이 대화하는 것처럼 남기려고 애썼는데, 늦어지면 사인만 하고 자세히 읽지도 못하고 돌려주기도 했었다. 그래서 자괴감이 확 들었었는데.
그냥 글똥누기 가지고 나와서 대화하면 되는 것이었다. 키워드만 적어 두면 확인도 되고, 기억도 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도 선생님이 자기 이름 옆에 뭐 적는지 매우 궁금해한다는 점에서 책무성 서로 신경쓰게 된다는 점이다.
한 가지 꿀팁을 또 알려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알림장 검사를 글똥누기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음 날 아침, 스스로 알림장에 쓴 대로 준비하고 실행했는지를 체크하면 되는 것이었다. 뭐 내라, 가져 왔니, 오늘도 지우개 안 사왔니 이런 말을 할 에너지와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생생하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전문가의 손길을 느껴보십쇼 비달 사순 나는 옛날사람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끝나가는 마당에 공책쓰기를 이제 아이들도 나도 새삼스럽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의 학생이 내가 특별하게 말하지 않아도 공책을 잘 활용했던 것처럼, 10%의 학생들은 특별하게 말하지 않으면 공책을 쓰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왜 공책을 활용하려했던가를 천천히 곱씹어보며 내년을 기약 아이들이 필요성을 깨달을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
공책이 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고, 아이가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