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들] #2. 산더미처럼 쌓아 두기
왜 이렇게 우리 반 교실이 좁고 먼지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 오늘따라 햇빛도 침침하고 왠지 어두컴컴하구만. 옆반은 환하고 바람이 솔솔 통하고 왠지 향기가 날 것만 같이 화사한데. 같은 층 바로 옆인데 햇빛이 우리 반만 차별할 리 없잖아. 원인은 바로, 정리정돈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군.
그제서야 눈을 들어 주위를 본다. 어수선한 책상. 책 옆에 책, 책 위에 누워 있는 책, 교과서 사이에 꽂힌 지도서, 물잔, 아이들이 선물로 준 종이접기, 프린트, 또 프린트, 평가 안 된 활동지, 평가한 활동지, 쌓아 둔 독서록. 손을 대자 먼지가 폴폴 햇빛에 정체를 드러낸다. 정리를 할 때다.
쌓여 있는 책상을 보니 어수선한 내 뇌 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민망하기만 하다. 아이들에게 책상 위에 필요한 것만 꺼내고 나머지는 넣으라고, 5초의 여유를 갖고 정리하라고 지도하지만 사실 가장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가. 찔린다.
_의도와 속마음_
초등교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순간적으로 교육적 판단을 내리는 멀티태스커다. 무언가 열중해 있다 보면 메신저가 오고, 아이들에게 지시를 하고, 누군가 나와서 회신서를 내밀고, 통신문이 배달되어 오고, 교과 시간이라 책상 모니터와 마우스 주변 빈자리를 좀 만드느라 겹쳐 놓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서야 하고, 뭔가 꼭 놓고 오고, 쉬는 시간이 끝나고, 회람에 사인하고, 중재하거나 상담을 하고, 수업을 하고, 알림장을 쓰고, 오늘까지 제출이라는 정중한 굵은 글씨 메신저가 오고, 2시 반이 되고, 전화가 오고, 다시 자리에 앉아 한 숨 돌리면서 차 한 잔 마실 짬도,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깜빡깜빡 하는 하루.
오래 걸릴 것 없는 일이고, 마감 전에 하는 것이 당연한데, 아직 우아하게 물 흐르듯 처리하는 경지에 닿지 못한 나. 부장님께서 메신저 반응속도를 높여 보라고 조언도 해 주시지만 깔끔하게 해내시는 분들을 보며 부럽기만 하다. 난 왜 늘 허둥지둥하는 것 같지. 지난주에는 수업 나눔, 교직원 연수, 교직원 현장연수, 이번 주에는 학예회, 어느새 다가오는 평가들. 이것만 끝내 놓으면 정리해야지, 하면 어느새 밀쳐두었던 일들이 다가온다.
나는 왜 이렇게 정리에 무능할까?
바빠서, 좁아서, 창의적이라서, 놓은 자리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버리진 않으니까, 할 때는 또 확실하게 하니까. 오만 가지 변명을 늘어 놓아 보기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정리해야 한다는 마음은 늘 있지만 어느새 쌓이고 뒤섞이는 물건들, 문서들, 파일들.
찰스 두히그는 『습관의 힘』에서 "습관은 운명이 아니다. 습관은 잊힐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으며 대체될 수도 있다."(42쪽)라고 한다. 그는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신호-반복 행동-보상, 3단계의 습관 고리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 뇌는 활동을 절약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으며, 반복된 습관은 뇌에게 휴식할 시간을 준다고 한다.
"첫 단계는 신호다. 신호는 우리 뇌에게 자동 모드로 들어가 어떤 습관을 사용하라고 명령하는 자극, 방아쇠이다.
다음 단계는 반복 행동(몸, 심리, 감정)이다.
마지막 단계는 보상이다. 보상은 뇌가 이 특정한 고리를 앞으로도 계속 기억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호-반복 행동-보상'이 반복되면 고리는 점점 기계적으로 변해 간다. 신호와 보상이 서로 얽히면서 강렬한 기대감과 욕망까지 나타난다. 그리하여 마침내 습관이 탄생한다."(41쪽)
"습관을 바꾸고 싶다면, 실행하지 못하는 원인을 찾고,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열망을 대신 채워 줄 새로운 반복 행동을 생각해 내고,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성공한 사람이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줄 공동체를 찾"아야 한다.(142쪽)
정리하는 습관을 갖고 싶은 나의 경우라면,
○ 정리 정돈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 : 바쁘다.
○ 변할 수 있다는 믿음 : 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루 24시간, 8시간의 근무를 한다. 내가 못할 건 뭔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 난다
○ 신호 : 자리를 이동한다.
○ 반복 행동 : 겹쳐 두거나 쑤셔 넣거나 싸들고 옮긴다. → 보이는 대로, 손 닿는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정리하고 처리하고 움직인다.
○ 보상 : 사진을 찍어 볼까. 그래 주변이 지저분해서 셀카도 못 찍었자나 각이 안나옴 ㅠㅠ
○ 공동체 : 지쳐서 의자에 퍼져 앉고 싶을 때마다 깨끗하고 화사하고 밝고 깔끔한 옆 반, 옆옆반, 옆옆옆반에 들르자. 저희 반에 초대할게요 누추하지만
_그래서 이렇게_
조윤경의 『3배속 살림법』을 보면, 청소할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15분 청소법을 권하고 있다. 일단 정리를 하기 위해 일어나고 시작하는 첫 걸음이 중요. 그 다음에는 도미노처럼, 관련된 일을 이어 붙여서 세트를 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조언을 한다. '행동 덩이'를 만들기. 그래서 나도 5초, 15초, 5분, 15분 정리 방법을 생각해 본다. 뇌로 정리하기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 5초 정리
[학생들이 제출한 종이] 이름 붙인 바구니에 담게 하고 스스로 체크판에 표시하기. 종이가 낱장으로 돌아다니는 순간 제출 기한이 끝날 때까지 만날 수 없다. 어 그래그래 지금 가져왔어? 이쪽으로 줘~ 말한 건 기억나는데 어느 쪽이었을까 원망스런 왼손 녀석 오른손은 왜 모르니 모둠준비물은 쌓을 수 있는 바구니에, 문서는 겹칠 수 있는 바구니에. 바구니부자 김보법 선생님의 회신문 제출 폴더를 구입해서 칠판에 붙여 두는 것도 좋은 방법.
특히 체험학습 신청서/보고서, 질병결석계는 내림차순으로 정리. 큼직한 집게 하나면 OK. 일단 받은 순서대로 위쪽에 둔다.
[프린트한 종이] 자리를 떠날 때, 버릴 것인지 모을 것인지 판단하고 일어서면서 갈 곳으로 보낸다. 버리는 것은 쓰레기통으로, 보관할 것은 파일에 손을 뻗는다.(옆면에 종이를 끼워 이름을 쓴다.) 진짜 중요한 연수물은 벽에 붙인다. 생기부 작성 유의사항 또 봐도 또 틀려요 단면인쇄 된 종이는 이면지함으로 이동. 이면지함이 차 있으면 비운다. 정리달인은 이면지따위 가차없이 버리겠지 ㅠㅠ
[신발] 안 보이는 곳에 벗어 둔다. 발에 자꾸 채이는 내 신발 미안해
[윗옷] 안 보이는 곳에 넣어 둔다. 한 번 벗어두면 애들 갈 때까지 안 입는다. 왜냐구요 팔 걷어 붙이고 수업하는 정열 때문이죠
♣ 15초 정리
[먼지] 점심 먹고 나서/물 엎었을 때 물티슈 꺼낸 김에 모니터 위, 책상 위, 사물함 등 손 닿는 대로 쓱 훔치기. 바닥에 던져놓고 발로 얼룩 닦기. 양치하러 가는 길에 버리고 손 씻기.
[출력한 활동지] 교과서 해당 쪽에 끼워둔다. 어머 없어졌네 다시 복사해 오면 빼꼼 만나게 되는 너
[가정통신문] 받은 즉시 나누어 준다. 내 손을 떠나거라 받은 즉시 통신문 전용 통에 담아 둔다. 알림장 쓰기 전 시선을 반드시 그 곳에 한 번 준다.
[USB] 늘 넣는 곳에 두기. 이름 붙여 놓기. 전화번호도 붙여 놓기. USB마다 드라이브 이름 지정하기.
♣ 5분 정리
[수행평가] 활동지를 걷어서 평가 및 채점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70% 이상 과제를 수행하면 순회지도 하며 표시해 주고 채점 근거 및 조언 한 마디 해 주기. 순시하다 보면 나중 학생들이 갈수록 개선됨. 다시 한 바퀴 돌 때나 활동 마치고 보완해서 나오면 반영해 줄 것. 바로 이게 과정중심평가 아입니까
[책꽂이] 키순으로 정렬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 15분 정리
[사물함] 종류별로 모은다. #통 #바구니 #작은바구니도 사야겠구나 자주 쓰는 것은 가까운 쪽에, 안 쓰는 것은 나누거나 버린다. 이상하게 색종이 몇 장 남은 건 왜 꼭 쓸 것 같죠 안 나오는 사인펜도 왜 모아두고 싶죠 3년 안 쓴 스탬프는 버려도 될텐데 왜 스티커는 잃어버리고 새 거 나눠 주면 나타나는 걸까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파일] 파일 이름 제대로 달기. 마우스 오른쪽 클릭>분류 기준>수정한 날짜 기준 내림차순으로 분류. 바탕화면 정리하기. 다운로드, 메신저 다운로드 정리하기. 보관할 파일은 폴더에 넣기. 구버전 검색해서 싹 버리기. 과정안.hwp 과정안2222.hwp 과정안끝.hwp 과정안고친 거.hwp 과정안진짜끝.hwp 과정안완성.hwp 과정안제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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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실패와 실패감을 날카롭게 들여다 보고 싶었는데. 어쩐지 해결책을 밝혀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은 내려 놓고, 나도 잘하지 못하면서 쉽게 묘책을 적으려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렇게"를 쓰다 보니, 길어졌다. 오늘도 소소한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