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선생되다 10. 어려도 사랑은 뜨겁게
세상에는 바나나 우유도 있고 초코우유도 있고, 딸기우유도 있는데, 너에게만 주고 싶은 우유가 뭔지 알아?
아이럽우유.
오늘 우체국 아저씨랑 싸우고 왔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내려고 하는 데 너무 커서 보낼 수가 없다는 거야.
얼마나 큰 지는 직접 보여줄게.
-출처, 러브장.
13살 태석이는 꼬박 1년동안 같은 학년의 그녀를 짝사랑했다. 태석이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당시 허술했던 청소년 노동법을 뚫고 전단지 돌리기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전단지를 버리거나 한 집에 여러 장 겹쳐 붙이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돈도 제대로 못 받으니 학교 끝나자마자 골목을 뛰어다니며 한 집에 하나씩 꼬박 반나절을 붙여야 했다. 학교 앞 문방구 뽑기통의 유혹도, 컵볶이의 치명적인 냄새도 이겨내야 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태석이는 가방이며, 인형이며, 모자며, 빼빼로며, 사탕이며 뭐 그런 것들을 준비했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녀가 웃어주기라도 한다면 그간의 노고는 눈 녹듯 사라질 것이었다.
위 문단의 '같은 학년에 그녀'는 나다. 나란 사람,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남의 마음만 송두리째 앗는 사람. (드립입니다). 이상한 유행이었다. 각종 기념일에 '너 이번엔 누구한테 줄거야?'라는 질문이 서로를 향했다. 사랑의 짝대기 예상도를 그리는 것은 각종 기념일의 별미였다. 어떤 자식들은 바로 전 기념일에 내 친구한테 선물을 줬다가 다음 기념일엔 그새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며 나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때 당시 우리 학년엔 철새같은 사랑이 유행 중이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1년을 꼬박 오로지 나 하나만 바라보며 꾸준히 선물을 건네는 태석이었으니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할 수 밖에.
'ㄴr랑 ㅅr겨줄ㄹri?' 태석이의 버디버디 메세지에 '그ㄹri. 오늘부터 1일'로 화답하며 우리는 공식 커플이 되었다. 태석이는 우리 학년에서 꽤 입지가 있던터라 나와 태석이의 연애 진행상황은 항상 핫이슈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석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태석이 앞에서만 행동이 불편해졌다. 다른 아이들과 왁자지껄 놀다가도 그 아이만 나타나면 말수가 적어지고 시선은 의식적으로 다른 아이들을 향했다.
나의 있는지 없는지 모를 태석이에 대한 애정은 가상현실에서만 폭발하였다. 커플이 되자마자 러브장부터 썼다. 온갖 창의성을 쏟아부어 오글거리는 사랑멘트가 가득한, 손가락으로 펼쳐 읽다가 오글거림에 손가락이 사라져 발가락으로 덮어야 할 법한 러브장이었다. 미술교육은 러브장에서부터 아니겠는가. 버디버디 메세지로는 사랑을 속삭였다. '보고ㅅi퍼' 'ㅅr랑ㅎrI' 그러나 현실에서는 마주치면 안될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피해다녔다. 이게 무슨 사이일까. 사이버 연애인가. 결국 나는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이 끓어오르는 사랑과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의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사귄지 한 달이 채 안 돼 이별을 고했다(버디버디로). 태석이가 그후로 꽤 진하게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고 남자 아이들에게 전해들었다. 그렇게 첫사랑이 지나갔다.
아니다, 돌이켜봤을 때 내 인생 첫사랑은 고 1에서 고 2 넘어가는 겨울방학에 찾아왔다.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불타오르는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영수 단과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자습실에 가기위해 학원 복도를 걷다가 교실 문 하나가 열려 있길래 무심코 쳐다보며 지나쳤다. 그런데, 무언가를 본 느낌에 걸음을 멈췄고 뒤로 몇 걸음 걸어 그 교실을 다시 들여다봤다. 거기엔 하늘에서 내려온 순백의 남신이 있었다. 남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외우기 위해 중얼거리며 공부하고 있었다. 내 첫사랑이라 부를만한 존재, 상현오빠였다. 나는 복도에 서서 한참동안 그 오빠를 바라봤다. 귀가 멍해지고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버렸다. 세상엔 상현오빠와 나만 남은 듯 했다. 그렇게 첫사랑의 문이 열렸다.
불타오르는 학업에 대한 열정은 어느새 오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으로 변하였다. 친구의 아는 오빠의 친구라는 사실을 안 뒤로 오빠랑 밥 한 번 먹어보려고 친구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제일 좋아하는 감자고로케 두 알에 케찹과 머스타드로 쌍하트를 만들어 뿌려 오빠에게 갖다바쳤다. 자려고 누우면 그의 얼굴이 천정을 가득 채우고 책을 폈는데 오빠 목소리가 들려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나의 애타는 사랑이 안쓰러웠던 친구는 아는 오빠를 꼬셔서 그오빠 친구 무리들과 동네 노래방도 데려가주었다. 그 때 노래를 목으로 불렀는지 코로 불렀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 오빠랑 내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에 머리가 아득했다.
친구에게 들인 정성의 결실로 오빠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나는 몇 날 며칠 폰을 붙잡고 고민하다 돌직구를 날렸다.
"오빠, 저랑 영화 보러 갈래요?"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순간은 또 얼마나 영겁의 시간이던가.
"은진아, 미안. 오빠가 이제 고 3이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할 때여서."
까였다.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우리 나라 입시제도를 싫어한다. 연애할 틈도 안 주는 팍팍한 입시제도(입시제도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러나 미저리끼가 다분한 나는 그 후로도 몇 달을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오빠 등교 시간 즈음 오빠네 학교 정문 주변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연기를 했다.
6학년 아이들 가르칠 때면, 연애설이 여기 저기서 들려온다. 애타는 짝사랑썰도 있고, 커플 성사썰, 데이트썰도 있고, 바람난 썰도 가끔 들려오고. 그럴때면 나는 속으로 '하이고, 너네가 사랑을 아냐, 쪼끄만 것들이.'하면서 코웃음을 친다. 뭔가 같잖아보인다고 해야 하나. 이건 나의 어릴 적 사랑을 떠올려도 비슷한 느낌이다. 뭔가 어이가 없다.
그러나 지금도 사랑을 모르겠는 건 매한가지고, 지금의 나는 며칠을 전단지 돌려 모은 돈 전부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샀던 태석이 정도의 사랑을 할 수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에도 나이가 있나. 내 나이는 사랑하기 적당한 나이인가. 13살은, 17살은?
어려도, 아니 어려서 정말 사랑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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