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식 vs 참여형 part3(완)] 귀납적 수업과 연역적 수업
#0. 열린 교실 공포증
20여년전 힘들게 열린교실이 몇년이 지나지 않아 결국 닫힌 교실이 된 것을 보았을 때
허물었던 벽을 다시 세우는 것을 지켜보았던 선생님께
왜 이렇게 되었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때 그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교사, 학생 모두에게 좋지 않은 실험이었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말했던 가장 큰 장애물은 '결과의 불확실성'이었습니다.
참여형 수업을 위해 교사와 학생 모두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것을 왜 하는지 모른채 그냥 열심히 하기만 하다가
교사와 학생 모두 지쳐버리게 된 점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노력의 의미를 그 노력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면
열었던 벽을 다시 닫아버리는 결과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열린 교실 공포증'을 만들어 냈습니다.
20여년 후 우리는 다시 닫힌 교실을 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의 실패를 반복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교실의 벽을 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 연역법과 귀납법
옛날 학생일 때 전국의 학생들을 강타했던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 책은 '논리야 놀자' 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은 논술이 대입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억 중 다른 것은 다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연역법과 귀납법이라는 단어는 기억에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논리를 통해 어떤 내용을 증명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연역법은 일반적 원리를 전제로 하여 구체적 사실을 이끌어내는 과정이고
귀납법은 개별적 명제로부터 일반적인 진리를 추론해 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논리를 펼치는 다른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가지 논리법은 한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연역 삼단논법에서 하고 싶은 말은 개미는 곤충이다. 라는 말이고
귀납추론에서 하고 싶은 말은 개미와 메뚜기는 공통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위의 이야기가 상당히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연역법과 귀납법이라는 것은 결국 사고의 흐름을 도식화 해 나타낸 것입니다.
연역법에 맞게 이야기 해 보자면
연역법과 귀납법은 우리 사회의 모든 면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수업도 사회의 하나의 단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업도 연역법과 귀납법으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2. 귀납적 수업
귀납적 수업은 다양한 발견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공통적인 원리의 발견을 목적으로 합니다.
귀납적 수업은 구성주의 철학을 잘 담고 있습니다.
다양한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것의 공통적인 성질을 알아내고
그 성질을 바탕으로 수업에서 배워야 할 원리나 지식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하는 일반적인 참여형 수업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귀납적 수업을 간단하게 도식화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귀납적 수업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교사가 말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알 수 있는 내용을 체험할 때
2. 학생들이 교사가 제시하는 활동에서 공통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때
3. 학생들에게 익숙한 체험이기 때문에 쉽게 몰입할 수 있을 때
4. 교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간결하고 명료할 때
일반적으로 참여형 수업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내가 체험하고 발견한 것이 공통적인 성질을 찾기 어렵거나
그것이 수업시간에 배워야할 지식에 닿지 못할 때 수업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때 내 행동의 의미를 교사가 정리해 줌으로써 내 행동과 수업과의 관계를 조금 더 명확하게 정리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수업의 정리를 교사가 해 주느냐 활동의 종료로 수업을 마무리 해 주느냐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수업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업의 흐름은 학생들이 처음부터 갈피를 잡지 못할 경우 진행하기 어려움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래서 귀납적 수업만으로 참여형 수업을 유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참여형 수업의 발상을 조금 더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연역적 수업
연역적수업은 일반적 원리를 기준으로 다양한 사고의 확장을 목적으로 합니다.
연역법에서 말하는 일반적 원리는 절대적 명제입니다.
다시말해 정언명령 즉 보편적 원리가 됩니다.
우리는 수업을 통해 이런 원리들을 배워나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수업시간에 배우는 지식과 같습니다.
강의식 수업은 이 원리를 학생들에게 직접 전달해 주는 것을 목표로 진행합니다.
그런데 연역법에서 볼 때 이 원리는 끝점이 아니라 시작점에 있습니다.
강의식 수업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이 바로 이점에 있습니다.
이 원리를 알고 있는 것은 달리기의 출발선에서 스타팅 준비를 마친 것인데
마치 이것을 알고 있는 것 자체로 결승을 통과한 것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역적으로 수업을 진행해 나간다는 것은
내가 수업을 통해 새로 알게된 지식을 다른 구체적 사실로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수업시간에 강의를 통해 배운 지식을 기본으로 직접 참여하면서 체험하고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하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연역적 수업의 가장 기본적인 수업 방향입니다.
이 방식은 두개의 큰 장점이 있습니다.
1) 학생들이 수업의 기본 방향을 알고 참여를 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공통적인 흐름으로 진행 할 수 있다.
2)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알고 진행하기 때문에 더욱 몰입할 수 있다.
#4. 참여형 수업의 새로운 성장
얼마전까지 전국을 떠들썩 하게 했던 수업이 두개가 있다면
거꾸로교실과 배움의 공동체를 들 수 있습니다.
거꾸로교실과 배움의 공동체는 다른듯 하지만 간단한 강의를 통해 그 진리를 탐구해간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연역적 수업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꾸로교실은 강의식 수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강의를 간단한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사전에 집에서 보고 오도록 함으로써
수업시간을 오롯이 학생 참여를 위한 시간으로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수업의 질과 양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습니다.
배움의 공동체는 홉-스텝-점프라는 도움닫기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활동을 위해 필수적인 개념 위주로 간단하게 정리해 주고
기존의 수업방식에서 필요없는 부분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점프과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였고,
개념의 빈칸은 학생들의 협력을 통해 함께 해결해 가면서
하나의 배움 공동체로 성장하게 하는 수업방식입니다.
위의 두 수업방식은 강의식 수업과 참여형 수업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통설을 깨고
강의식 수업의 장점과 참여형 수업의 장점의 교집합을 통해
학생들이 조금 더 배움에 몰입할 수 있는 참여형 수업의 대안을 제시했다는데 그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식들은 공통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1) 강의 -
수업에서 배워야 할 내용의 핵심은 간결하고 명료해야 합니다.
교사의 강의가 간결하지 못한다면 학생들은 강의를 통해 핵심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학생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 개념위주로
교사의 강의를 정돈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참여 -
(1) 학생들의 참여는 지식을 확장하는 방향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 배운 지식이 필요없는 활동은 흥미는 있을지 몰라도 그 지식의 의미를 이끌어 내기는 어렵습니다.
(2) 너무 쉬워서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너무 어려워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과제는 학생들이 진의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3) 학생들이 갖고 있는 개념의 빈칸은 서로 다릅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협력으로 이 다른 빈칸을 함께 채워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5. 마치며
역량이 중요하냐 지식이 중요하냐는 엄마와 아빠중 누가 좋으냐와 같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의미를 찾지 못한 지식은 삶과 지식을 분리시킴으로써 도태됩니다.
학교의 본질이 학생의 배움과 성장에 있다고 볼 때 현대 사회의 학교의 붕괴의 원인 중 큰 것은
'이것을 우리는 왜 배울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내가 한 행동이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 행동은 '나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리오네트가 된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여형 수업의 가장 큰 보상은
'내 행동의 의미를 찾아주는 것'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상황에서 교사의 역할은 달라질 수 밖에 없고 그때마다 딜레마에 쌓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교육이 학생들을 위함이라는 등대를 보고
나를 믿고 학생들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학생을 위해 수업합니다. 나는 교사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학생중심 수업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