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존재, 가치 있어!(의미 있는 역할)
다시 돌아간 학교, 한달 반 동안의 공백을 어떻게 메우고 시작할까 고민했습니다.
아이들과 그동안 배웠던 영어 표현들을 복습하는 시간을 가질까? 바로 진도를 나갈까? 간단한 게임을 하면서 관계 맺는 시간을 가질까?
고민 끝에 학급긍정훈육에 나온 '의미 있는 역할'을 정하고 우리의 가이드라인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해보는 것으로 첫 시간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학급긍정훈육에서 말하는 '의미 있는 역할'은 학급에서 주로 활용하는 1인 1역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할을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조금 다릅니다. 학생 개개인이 학급에서 필요한 역할의 일부를 맡아 어떠한 일을 수행한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1인 1역은 '책임감'에 의미 있는 역할은 '소속감'에 좀더 큰 비중과 가치를 둡니다.
아이들은 의미 있는 역할을 통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공동체를 위해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며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아이들과 의미 있는 역할을 정했던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깨달은 의미를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 의미 있는 역할 정하기 과정
'학급긍정훈육 실천편'이라는 책을 보면 의미 있는 역할을 정하는 과정이 더욱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아이들과 했던 간단한 과정을 이야기 형태로 적으려고 합니다.
1. 의미 있는 역할 소개하기
" 여러분과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좀 더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내고 싶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영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의미 있는 역할'을 정해볼 겁니다. 이건 여러분이 반에서 하고 있는 1인 1역과도 비슷해요. 앞으로 영어 시간에 우리 모두는 한 가지 역할을 맡게 될 거예요. 그 역할들은 선생님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역할들로 정할 겁니다."
2. 필요한 역할 생각해보기
" 영어 시간에 필요한 역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해봅시다. 여러분의 생각은 모두 소중합니다. "
(학생들의 대답을 빠짐없이 칠판에 적습니다. 아이들이 다양한 역할을 생각해내지 못할 경우 다른 반의 역할들을 참고로 보여주거나 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역할을 아이들의 동의를 구해 추가합니다.)
필요한 역할들은 칠판닦기, 줄 세우기, 눈치주기, 숙제 검사하기, 학습 도우미, 선생님 도우미, 게임 시범 보이기, 두고 간 물건 확인하기, 준비물 나누기, 거두기, 물건 빌려주기 등등 여러가지가 나옵니다.
3. 역할의 이름 정해보기
" 많은 역할들이 필요하네요. 그런데 여러분은 선생님이 '칠판닦기 나오세요.' 라고 할 때, 어떤 기분이 드나요? 이 역할을 맡는 친구들이 들었을 때 기분 좋은 이름, 사랑스러운 이름을 정해서 불러주면 더 좋겠어요. 예를 들면, 물건 빌려주는 친구는 엔젤, 영어 시간에는 없지만 우유를 가져오는 친구를 아이슈타인 등으로 재미있게 바꿔주는 거예요."
역할들의 이름을 아이들과 함께 정합니다. 여기저기서 재미 있는 이름, 정말 창의적인 이름들이 튀어 나옵니다. 역할의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미 한바탕 웃고 시작합니다. 평소 말이 없던 학생들도 피식거리거나 어떤 이름이 어울릴지 골똘히 생각합니다.
역할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이 바뀝니다. (4학년의 한 반 예시)
공책 가져왔는지 확인하기: 꼼꼼이
격려하는 사람: 리더맨
선생님 도우미: 쌤도
친구들이 다른 행동할 때 눈치주기: 레이저
준비물 나누기: 쉐어걸
영어 시간 후, 두고 간 물건 확인해서 챙겨주기: 사신맨
칠판 닦기, 칠판 정리: 지우개군
학습도우미: 프렌드 티쳐
분위기 업 시키기: 흥국맨
토킹 스틱 돌리기: 스틱맨
숙제 검사: 도라에몽
학용품 빌려주기: 창고
거두기: 거둠이
4.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 정하기
" 자신이 이 중에서 하고 싶은 역할을 정해봅시다." (지원자가 많을 경우, rock scissors, paper로 결정)
5. 아무 역할도 맡지 않은 아이들은?
의미 있는 역할을 정하다 보면 내향적인 성격의 아이들이나 영어 학습에 자신이 없는 아이들,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역할을 맡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아이들이 중요합니다. 영어 시간에 좀더 소속감과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역할을 정해줍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역할이 어울릴지 물어봐도 좋지만 그렇게 안 된다면 교사가 역할을 정해줍니다.
제가 몇몇 아이들에게 정해준 역할입니다.
숙제나 공부한 것들에 대해 정직하게 알려주는, 정직걸
선생님의 대화 상대가 필요할 때 돕는, 토킹짝
수업 시간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타이머
줄을 다 섰을 경우 출발하자고 말해주는, 렛츠고
#. 이렇게 모든 아이들이 하나의 역할을 맡아 자신의 존재를 친구들에게 알립니다.
아이들은 자기 역할을 수행하면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신감과 유능감, 소속감을 키워 나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혹은 인정받을 만한 조건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맡으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 의미 있는 역할, 교담교사에게도 '여유'가 생깁니다.
1. '단티' 가 주는 여유
교담교사는 쉬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영어 교담은 틀린 단어시험을 보느라 쉬는 시간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데 의미 있는 역할에 단어 시험을 봐주는 역할을(어떤 반에서는 '단티': 단어 티쳐의 준말) 정한 후, 저에게도 자유가 생겼습니다. 틀린 단어를 선생님과 시험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 교실에서 시간이 있을 때 단어 시험 봐주는 아이와 함께 시험을 보고 선생님께 결과만 알려주도록 했습니다.
아이들도 교실과 교담실의 먼 거리를 오갈 필요도 없고, 시간 날 때 친구와 함께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2. '지우개군'이 주는 여유
쉬는 시간에 늘 하는 일이 칠판 지우기, 붙인 자료 다시 떼어내기 였습니다. 그런데 의미 있는 역할을 정하고 난 후, 지우개군 2명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칠판으로 달려와서 후다닥 자기 역할을 하고 갑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정말 고맙습니다.
3. '거둠이', '쉐어걸'이 주는 여유
수업 중, 제가 나누고 거둬야 할 것들을 대신 해주니 그 시간을 아껴 다음 활동을 준비하고 한번 더 아이들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4. '흥국맨'이 주는 마음의 여유
월요일 1교시, 교실에서 혼나고 온 날, 날씨가 푹푹 찌는 여름 날은 아이들 기운도 없고 의욕도 없습니다. 이 때, 흥국맨이 개인기를 하나 보여주거나 퀴즈를 냅니다. 교사가 힘내자고 말하지 않아도 흥국맨이 대신 분위기를 업 시켜줍니다. 제게 마음의 여유를 선물해 줍니다.
이외에도 모든 역할이 나름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역할들은 교사와 친구들에게 어떤 '공헌'을 하게 됩니다.
#. Tip
교담교사는 여러 반을 맡습니다. 의미 있는 역할을 정하고 게시해야 할 때, ' 3M 이젤패드'를 활용하면 좋습니다. 대형 포스트잇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요.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에 각 반 것을 칠판 한 구석에 미리 붙여두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