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온 아이들
출산 휴가 90일이 정말 짧게 느껴집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있자면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지?' 라는 말보다는 '아, 진짜 시간 빨리간다.' 이 말이 더 자주 나옵니다.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휴가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출근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큰 변화 없이 자신의 개성대로 자신의 방향대로 그 아이답게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 한 명, 새로운 아이가 보입니다.
2학기 시작할 무렵에 전학 왔다고 합니다. 전학 온 지 이제 막 한 달을 넘긴 남자 아이, 영어교실에 들어 오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는 제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친구들이 그 아이의 이름이 뭔지 대신 말해주는데 저는 아이를 만나러 직접 자리 근처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물었습니다.
"What's your name?"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에 대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저 영어 못해요. 하나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다, 할 수 있다는 말 대신, 마음을 담아 눈을 마주치고 다정하게 웃어줬습니다.
"만나서 반갑다."
다음 날, 영어 동아리 활동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제 그 아이가 맨 뒷줄 구석에 혼자 앉아있습니다. 반가워서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어, 민국아(가명), 너 영어 동아리야? 우와, 반갑다."
어제 보다 짜증과 화가 더욱 고조된 목소리로 "여기 싫어요. 오기 싫은데 가위, 바위, 보 져서 왔어요."
곧 눈물도 날 것 같습니다.
"그랬구나, 원하지 않은 곳에 와서 짜증도 나고 하기 싫은 마음이 있겠네." 민국이의 마음과 감정에 먼저 관심이 가져 줍니다.
잠시 후, 친구들과의 모둠 활동을 시작합니다.
"민국아, 친구들이랑 이거 같이 해보자."
"안 해요, 싫어요. 하기 싫어요."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으며 안 한다는 말은 두 세번 반복해서 말합니다.
아이들이 원어민 선생님과 활동을 하는 동안,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그 아이에게 가서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옆에 앉아 한 두 마디 물었을 뿐인데 아이가 말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하는 말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아이는 대화의 화제가 바뀔때마다 그와 관련된 자기 속 이야기를 하나 둘 두서없이 풀어놓습니다.
어쩌면 아이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자기 마음을 알아 줄 한 사람이 필요했나봅니다. 아이는 잔소리 때문에 방과후 컴퓨터를 끊었다는 말도 솔직하게 합니다. 잔소리의 이유는 자기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아이가 그동안 어떤 과정을 반복하며 무기력의 늪에 빠지게 됐는지 짐작이 갑니다.
아이와 첫 대화는 들어주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간중간 "그러니까 이제 활동에 참여해보자. 그러니까 이제 열심히 해보자."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꾹꾹 참았습니다. 아이가 지금 필요로 하는 건 격려가 아니라 자기를 온전히 그리고 판단없이 바라봐주는 한 존재니까요.
저도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아이를 구슬리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아이를 아이 그 자체로 마주하고 싶습니다.
투덜투덜 귀여운 그 아이가, 내게로 왔습니다.
#. 선생님, 얘 또 말 안 해요.
소이(가명)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친한 친구 한 명 이외에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이로 이미 소문이 나 있습니다. 이 아이에게 영어시간은 불편한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소이와 짝을 이루어 대화하는 친구 또한 매번 답답한 마음을 느낄겁니다.
오늘도 소이와 대화짝이 된 아이가 볼멘소리를 합니다. 거의 1년 가까이 같은 반에서 지내온 친구라 소이가 말을 안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신이 대화하지 못하는 상황도 억울하니 선생님께 한 마디 합니다.
"선생님, 얘 또 말 안해요"
"그럼, 니가 할 말만 해줘, 소이가 다 알아 들으니까."
그리고는 제가 직접 소이의 대화짝이 되어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눈을 마주치고, 한 번 해보자고 격려했지만 역시 쉽사리 소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작게 말해도 되니까 귓속말로 속삭여달라고 부탁하며 귀를 가까이 댑니다. 그제서야 저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그렇게 용기 내어줘서 참 고맙습니다.
오늘, 이 아이도 영어 동아리 활동 시간에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습니다.
'어머, 소이도 있네.' 아까 민국이에 이어 소이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웃기기도 합니다.
소이는 말은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해내는 아이입니다. 오늘도 가위질부터 풀로 붙이는 일까지 말 없이 자기 속도대로 묵묵히 해냅니다. 말보다 행동하는 아이가 바로 소이입니다.
속삭이는, 이 수줍은 아이도 내게로 왔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반갑습니다.
앞으로, 내게로 온 이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무표정과 울상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상처와 문제들이 가벼워지도록 옆에서 돕고 싶습니다.
내게로 온 아이들에게 신중히 말하고 행동할 것을 이 글을 통해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