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한편입니다.
교담 교사와 담임교사, 아이를 사이에 두고 두 선생님이 만납니다.
“선생님, 학기말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조금 들떠있네요.”
교담 교사가 담임교사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저희 반에서는 괜찮았는데, 그랬었나요?”
두 선생님의 대화에서는 묘한 긴장감과 서로의 지도력에 대한 미묘한 평가가 드러납니다.
교담 교사> 교담 교사가 모여 있는 교담실에서는 주로 학생이나 반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갑니다. 요즘 수업 분위기는 어떤지, 힘든 학생은 누구인지, 반 분위기와 담임선생님의 성향은 어떤지에 대해 때로는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반에 대한 비교와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담임교사> 담임교사들은 교담 시간이 편하면서도 불편합니다. 교담 시간 분위기가 어수선했다는 말이 들리거나 교담 선생님께 혼이 났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교담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 반을 잘 관리하고 지도하지 못 해서 일까? 내 지도력이 부족한 걸까?’
남에게 드러나는 내 아이들의 안 좋은 모습들이 아이들의 문제인데 꼭 자신의 문제인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교담 교사와 담임교사는 서로에게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만 할까요?
교담 교사와 담임교사는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만납니다. 두 교사는 아이들의 성장과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는 아이의 성장을 위한 협력적인 대화가 될 것이며, 그 관계 또한 협력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목적과 본질이 사라진 관계에서 오가는 대화는 누구의 탓인지,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는 평가의 말이 될 뿐입니다. 대화 후에 남는 것은 개선되지 않은 문제 상황과 문제 아이.
앞으로 이 아이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아이를 위해 함께 어떤 노력할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는 사라집니다. 결국, 해결책과 대안이 없는 판단과 평가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문제를 문제삼기에만 급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합니다.
담임교사와 교담 교사는 ‘아이의 성장’을 위해 만난 같은 편, 한편입니다.
학부모와 교사, 아이를 사이에 두고 두 어른이 만납니다.
“어머니, 오늘 학교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와 이야기 잘 나누신 후에 지도 부탁드립니다.”
“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짧고도 긴 대화 후에 부모의 마음에 남겨지는 건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뿐만이 아닙니다. 왠지 모를 서운함과 수치심, 자괴감 등의 감정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불편한 감정 덩어리도 남습니다. 이 감정 덩어리는 분노라는 감정의 이름을 달고 곧장 아이에게로 향합니다.
흔히 교사는 부모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가정교육과 부모의 훈육 태도가 아이의 문제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문제를 인지했으면 교사와 학부모, 두 어른이 아이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몇해전, 학교교육과정 설명회 때 교장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랬습니다.
‘교사와 학부모가 상담을 하는 목적은 아이를 위해서입니다. 이 본질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몇 마디 되지 않는 교장선생님의 말씀 속에 깊은 지혜와 깨달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두 어른이 만나는 진짜 목적이 두 마디의 말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사와 부모도 ‘아이의 성장을 위해’ 만난 같은 편, 한편입니다.
아이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아이의 성장’ 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맺어진 관계,
아이를 위해 만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한편입니다."
(* 위 글에서 교담 교사와 담임교사의 모습은 바로 제 모습입니다. 제가 가진 불편한 마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본질을 잊고 있는 제가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