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신박하다, 신박의 어원
신박하다.
"신박한 프로그램 하나 소개합니다."
유튜브에 올렸던 영상에서 했던 말입니다. 편집 과정에서 신박한 이라는 낱말은 빼버렸습니다. 쓰지 않으려는 표현인데 저도 모르게 사용했더군요.
왜 쓰지 않냐구요? 이 말의 어원을 알게 된다면 아마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신기하다, 신선하다와 비슷한 뜻으로 쓰고 있지만, 국어사전에는 전혀 다른 뜻이 나옵니다. 신박하다는 인터넷 신조어입니다.
그 기원은 블리자드 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하 와우=WOW)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이 게임, 와우(WOW)에는 세력, 종족, 직업이 있고 각 직업 마다 '특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다크엘프, 드워프, 노움 종족의 동맹 세력인 '얼라이언스'와, 오크를 중심으로 트롤, 언데드, 타우렌 종족의 동맹 세력인 '호드'가 대립하는 설정의 게임입니다. 이 설정과 방대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게임 내에서 얼라이언스 플레이어와 호드 플레이어가 서로 만나면 대화가 불가능하고, 서로 적으로 인식해서 죽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얼닥눈 = 얼라이언스는 닥치고 눈팅이나 해라
호식자 = 호드는 식(씻)고 잠이나 자라
이런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즉, 게임 설정에 맞게 얼라이언스 유져와 호드 유져는 서로 대립하고 디스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였죠.
성기사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성기사는 오직 얼라이언스, 인간 종족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성기사는 모든 공격에 일시적으로 면역이 되는 무적이라는 기술이 있어서 그 끈질긴 생명력이 마치 바퀴벌레 같다고 바퀴라고 불렀습니다. 호드 유져들이 성기사를 디스하기 위해서 성바퀴, 성박, 바퀴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신성 특성 성기사 = 신성 바퀴벌레 = 신박(힐러)
보호 특성 성기사 = 보호 바퀴벌레 = 보박(탱커)
징벌 특성 성기사 = 징벌 바퀴벌레 = 징박(딜러)
성기사 중에서 신성 기술을 쓰는 경우를 두고 "신박"이라고 부른 것이 신박의 기원입니다. 치유 특성(힐러)은 비선호 직종(?)이고 성기사 자체가 인간 종족으로 제한된 탓에 ‘신박’이 귀했습니다.
그 희귀성에서 오늘날(?) ‘신박하다’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습니다. 조롱의 의미와, 희귀하다는 의미가 뒤섞여서 '신박하다'는 표현이 된 것입니다.
흔치 않은 신성 성기사(바퀴벌레) 유져이다 = 신박하다
신박하다를 비롯하여, 어그로, 광역 도발, 광역 어그로, 극딜, 오크녀, 태세전환 등의 출처도 역시 WOW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 디씨인사이드 WOW 갤러리(=와갤)에서 시작되어 확산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씨 와겔, 루리웹 와갤, 와우 인벤 등...
"신박하다"는 이제 공중파, 케이블 등 방송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인터넷 기사에서도 쓰입니다. 일상 대화 속에서도 상당히 많이 쓰이고, 심지어 교사들도 씁니다.
"신박하다"는 표현이 표준어 혹은 세련된 신조어 쯤으로 착각하고 널리 쓰이는 상황이 혼란스럽습니다.
최소한 신박의 ‘박’이 바퀴벌레라는 것은 알고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