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라피8화] 목소리의 형태 -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교사의 시선
※ 스포주의
학교폭력 문제의 심각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룰 건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습니다.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서 유사한 상황의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는 관점, 그리고 또 하나는 피해자를 회복시키고 가해자를 다시 선도하여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게끔 한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어떤 관점이 맞다고 할 순 없지만 언론매체의 여론을 살펴보니 현재는 전자의 관점이 더 우세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학교폭력 연수를 통해 학교폭력을 '교육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학교폭력 문제를 '교육적 관점'으로 바라 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마도 학교폭력에 관한 선생님의 개개인 경험의 몫이 제각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선생님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뭉클하거나, 혹은 불편하거나.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표면적으로 봤을 땐 왕따의 주범인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참회의 이야기만을 다룬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가해자를 위한 판타지'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불편하게 느낀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이 영화가 어설픈 친구놀이(?)를 하고 있는 가해자의 이야기가 아님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줄거리> 학교생활의 따분함을 이기지 못하던 '쇼야'의 학교에 귀가 들리지 않는 '쇼코'가 전학을 옵니다. '쇼야'의 짓궂은 장난에도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던 '쇼코'는 결국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고, 그 책임을 피하지 못했던 '쇼야'는 결국 외톨이가 됩니다. 6년째 외톨이의 모습을 하던 '쇼야'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다가 마지막으로 '쇼코'를 찾아가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게 됩니다. '쇼야'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못난 형태의 목소리를 남겼는가를 자책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가장 큰 아픔을 주었던 '쇼코'에게 자신이 '또 다른 형태'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또 다른 형태'는 바로 마음의 형태입니다. 마치 '쇼코'가 내는 목소리는 비록 아름다운 형태가 아닐지라도 그것이 어떤 형태든지 목소리를 내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것만 같습니다. |
학교폭력 문제를 통해 이 영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살펴보려 합니다.
1.
학교 현장에서는 학교폭력의 문제를 다룰 때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지어 대처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듯 ‘쇼야’는 가해자이면서도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가해학생도 교사가 계속 품어 주어야 할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쇼코’의 아픔과 ‘쇼야’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 '쇼코'의 아픔은 무엇일까요? '쇼코'는 선천적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쇼코'에게는 목소리의 형태가 필요했습니다. '쇼코'는 목소리를 내고 친구들에게 다가가려 하기도 합니다. 결과는... 참혹한 실패였습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는 친구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후 '쇼야'가 '쇼코'에게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나타나고,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지만, 이후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 상황을 마주하면서 이모든 문제가 자신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쇼코'의 자존감은 급격하게 낮아지게 됩니다. |
▶ '쇼야'의 아픔은 무엇일까요? '쇼야'는 '쇼코'를 괴롭힌 이후 왕따를 주도한 가해자로 지목되었고, 그 사건에 가담한 친구들의 배신과 다른 사람들의 낙인으로 인해 6년동안 힘겨운 시기를 보냅니다. 6년간 왕따를 당해보면서 '쇼코'의 아픔에 공감을 하게 되고, 진실하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으로 '쇼코'에게 다가갑니다. '쇼코'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려는 '쇼야'. 그러면서도 다른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쇼야'는 '쇼코'를 향한 속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쇼야' 역시 이 모든 문제가 자신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
이렇듯, '쇼코'와 '쇼야'는 알게 모르게 닮아 있었고, 결국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쇼코'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세상을 향한 용기입니다. '쇼야'는 '쇼코'에게 다음과 같은 마음을 전합니다. 비록 네가 내는 목소리는 아름다운 형태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포기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2.
이 영화는 학교폭력의 피해자, 가해자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은 ‘방관자’를 다루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학창시절 우리들 중 대부분은 어떤 이유에서건 어떤 학교폭력 사건의 ‘방관자’였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학교폭력 문제가 누군가 개입한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영화의 결말이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표가 존재하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똑같은 이유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나마 우리가 바라던 결말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화 속 문제상황에 완전히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관객으로서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속 인물들의 고통에 공감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책감’은 인간의 숭고한 감정입니다. 더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인간의 감정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궁극적인 지향점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초등학교 때 벌어진 학교폭력 사건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떤 상황을 겪게 되는지에 대한 미래 시점(고등학교 시기)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학교폭력이 벌어진 이후 인물들이 겪은 마음 속 상처를 학생들이 공감해 볼 수 있니다.
우리는 학교폭력을 저질렀던 '쇼야'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① 죄책감을 가지고 '쇼코'에게 다가가는 시도를 하지만 여전히 나쁜 놈
② 정말 나쁜 놈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된 도리를 하는 아이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쇼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교실에서 발생하는 학교폭력 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은 착한 일이 아니라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잘못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말은 아닙니다. '쇼코'가 학교폭력을 당했던 6학년의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또한 '쇼야'가 사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일도 아닙니다.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자체는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쇼야'의 마음가짐과 양심에 달려있는 것이지요.
목소리의 형태 명대사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쇼야'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수화를 배워 '쇼코'에게 다가가 용기내어 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