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라피2화] 인사이드아웃 -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 없다
※스포주의
첫 번째 글에 이어서 두 번째 글도 픽사 에니메이션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 많은 픽사 에니메이션을 다룰 것입니다 ^^)
픽사 에니메이션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주제를 어린 아이들도 이해하게 쉽게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지루하지 않게 말입니다.
오늘 다룰 영화 역시 결코 만만치 않은 영화입니다.
바로 '인사이드 아웃' 입니다.
1. 감정의 중요도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우리의 추상적인 감정을 5가지로 분류하여 중요한 인물로 시각화 하였습니다.
'기쁨, 슬픔, 까칠, 버럭, 소심' 입니다. 이 다섯가지 감정은 라일리의 감정컨트롤 타워에서 각각의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감정'은 교실 속 아이들과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엥? 이게 무슨 말일까요?)
처음부터 이 다섯가지 감정들이 서로 잘 어울리면 좋겠지만,
이 감정들 역시 우리 아이들처럼 누군가는 중요한 존재고, 누군간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도 이 다섯 가지 감정 중 아마도 '기쁨'을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기쁨' 이외의 감정을 도외시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제 스스로 다섯 가지 감정에 대한 순위를 매겨 보았습니다.
기쁨>소심>까칠>버럭>슬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수도 있겠습니다. 보편적으로는 기쁨이 슬픔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좀 더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빈 종이에 우리반 아이들 중 생각나는 학생 다섯명만 적어봅시다.
(오래 생각하지 마시고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세요 ^^)
아마도 이 친구들은 학급에서 눈에 띄거나 중요한 역할을 맡는 학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친구들을 기쁨, 소심, 까칠, 버럭, 슬픔 순으로 대입해 볼까요?
그렇다면 5명 이외의 아이들은? 대표적인 감정 축에도 못 끼는 것일까요...?
의문의 감정을 품은 채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2. 불필요한 감정?
영화를 보면 '기쁨'이는 '슬픔'이를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합니다. '슬픔'이 때문에 라일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더 어려워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기쁨'이는 '슬픔'이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 예로 조그만 원을 그어 '슬픔'이를 못나오게 하거나, '슬픔'이가 핵심기억에 접근하려는 시도조차 막아냅니다. 그러다 결국 일이 발생합니다. '기쁨'이가 '슬픔'이의 행동을 제지하다가 파이프 안에 빨려 들어가 감정 컨트롤 타워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이후 라일리의 감정체계는 올바로 작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기쁨과 슬픔을 느껴야 할 때 온전히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상대적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온도 역시 상대적이라 따뜻하고 시원함을 혹은 뜨거움과 차가움을 느낄 수 있듯이, 슬픔이 있어야 그 뒤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슬픔이 없다면? 기쁨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슬픔'이라는 감정을 억제해왔기 때문에 슬픔과 관련이 있는 감정에도 무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슬픔은 모든 정서와 관련이 있는 감정입니다. 즉 기쁨 역시 슬픔과 관련이 있는 정서입니다. 우리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오는 것 역시 기쁨과 슬픔이 같은 맥락의 정서임을 반증합니다. 이는 영화 속에서 '기쁨'이와 '슬픔'이의 머리색이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라일리가 느꼈던 큰 기쁨 중 하나도 바로 슬픔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키 경기 중 자기가 했던 큰 실수로 인해 큰 슬픔에 빠져있던 라일리는 '슬픔'이가 감정 컨트롤 타워에 다시 오게 됨으로써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기억은 라일리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더 큰 감정의 문제에 봉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기쁨'이는 라일리가 슬픔을 느껴야 할 때 자신이 억지로 감정을 컨트롤함으로써 더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 상황을 야기합니다. 슬픔 뒤에 나타날 기쁨의 정서를 맛보지 못해 감정 해소를 할 수도 없습니다. 슬퍼해야 하는 상황에서 슬픔을 느끼지 않고 덤덤하거나 혹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를 건강한 감정상태라 말할 수 있을까요?
감정코칭 직무 연수(조벽, 최성애 박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감정코칭의 핵심은 상대방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일로 슬퍼하고 있다면, 그 슬픔의 감정을 오롯이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각자의 문제로 슬픔에 빠질 때 우리는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조언해주거나, 그게 무슨 슬퍼할 일이냐며 타박을 주진 않았는지요?
많은 삶을 산 건 아니지만, 저 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일로 종종 씁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예전같았으면 크게 기뻐하고, 감동하고, 슬퍼해야 마땅한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감정에 무뎌지는 저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살면서 너무 기뻐서 우는 일도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낄 때 삶의 즐거움 역시 줄어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슬픈 영화를 보며 슬픈 감정에 젖어드는 것!
제가 자기 전마다 시도를 해보고 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저도 오롯이 슬픈 감정에 젖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감정 해소를 한 후에 찾아올 감정적 후련함을 선생님들께서도 종종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3. 다양한 감정, 그리고 다양한 아이들
'기쁨'이 뿐만 아니라 '슬픔'이 자체도 라일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감정임을 확인했습니다. 하물며 '까칠'이, '버럭'이, '소심'이는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사소하다고 느꼈던 감정,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그 나름대로 내 안의 자아를 이루는 중요한 감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여겼던 감정들을 느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심리치료가 아닌 것입니다. 기쁨만 느낄 수 있다면 그 상태를 우리는 결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그 자체로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감정에 따르는 무분별한 행동을 존중하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의 신체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기관이 불필요한 것 없이 모두 소중한 것처럼, 우리의 감정 역시 하나의 '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소중합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감정을, '우리 학급'의 학생들로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학생들은 제각기 다릅니다.
'우리 학급'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학생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과연 선생님께서 생각한 이상적인 학급이 될까요?
저는 해마다 학생들과 하는 활동이 있습니다. 큰 전지에 어떤 대상을 매직으로 그리고, 큰 전지를 여러 등분으로 나누어 학생들에게 나누어줍니다. 학생들이 받은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선들만 그려져 있습니다.
'이 선을 보고 떠오르는 것을 자유롭게 그려보세요.'
처음에는 머뭇거리지만, 이내 학생들은 몰입하여 무언가를 그려냅니다. 학생들이 그려낸 그림은 제각기 다릅니다. 학생들이 그림을 완성한 후 그 그림을 모았을 때 아이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이해를 합니다.
어떤 대상을 보고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묘하게 이 그림들을 모아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냥 아름답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학급'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그림 중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 그림이 되지 않습니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 하나 하나 모두 소중합니다. 때로는 선생님 말을 잘 안따라주고, 미운 행동만 골라서 하더라도 그 아이는 필요할 때 우리 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줍니다. 이처럼 다채롭기 때문에 우리 학급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아이들 그 자체로 인정해주고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선생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 마음 속 빙봉이
이 영화를 다룰 때 빙봉이를 빼놓고 얘기한다면 무척이나 섭섭할 것입니다.
빙봉이는 라일리의 어릴적 상상의 친구 입니다.
라일리의 어린 시절 빙봉이는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의 모든 것을 충족해 줄 수 없을 때 내 자아 속 빙봉이는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외로울 때, 언제든 함께할 수 있는 상상의 친구 '빙봉'이가 그 필요를 대신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더 이상 '빙봉'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빙봉'은 자신의 역할을 '우리'의 의지에 맡깁니다. 이제 혼자서도 잘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빙봉'이를 놓아주지 못한 아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빙봉'은 마치 토이스토리3에서 앤디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우디'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다양한 감정을 존중해 주는 것과 함께 우리는 이제 자라난 아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빙봉'과 이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대학생이 된 '우디'가 장난감들과 이별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아이들의 성장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선생님들의 역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