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 지금부터 Q 2탄] 2. 공대넓얕(공감에 대한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공감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정리하고 가야할 게 있다. 이 오해들이 정리되지 않으면 서로 다른 주파수를 맞춘 채 라디오에 귀만 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하나 차근 차근 정리해보자.
[오해 하나. 감정 = 마음 = 느낌 = 생각???]
학생 둘이 싸웠다. 교사인 당신은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한 녀석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사건의 개요를 듣고 질문을 한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 때 니 ( )은 어땠니?”
문제) 위의 괄호 안에 들어갈 정답은?
① 감정 ② 마음 ③ 느낌 ④ 생각 ⑤ 기분
정답을 바로 확신하는 사람은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도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음을 함께 보기를 권한다. 교과서를 잠깐 보자.
‘앞의 그림 ③에서 한이의 모습은 인물의 어떤 마음을 나타내었는지 친구들과 이야기하여 봅시다.’
‘민수의 기분은 어땠을지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수정이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과연 위의 세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 양상이 다를까? 우리는 위 낱말들의 의미가 비슷하기에 혼용하는 경향이 있다.실제로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까지 그렇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 때 니 감정은 어땠니?”
“쟤가 저한테 한 그대로 똑같이 때려주고 싶었어요.”
“아니, 감정이 어땠냐고.”
“복수하고 싶었어요.”
“아니, 감정, 감정.”
그래서 공감, 감정에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명확한 용어 정의를 하고자 한다. 사실 이 용어들에 대한 해석도 무척 다양하다. 하지만 나의 경험과 가장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해석을 적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최근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마음이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걸 전제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뇌가 외부 자극을 인지하면 그것을 마음에 보낸다. 마음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무척 어려운데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삶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이 외부 자극을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해석한다.(이 해석에 영향을 주는 게 바로 생각과 태도다.) 그리고 그 결과를 다시 뇌에게 보내는데 이 신호체계가 바로 감정이며 그리고 그 감정을 기반으로 판단을 한 뒤 결심 /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친구가 이유 없이 갑자기 내 머리를 때림(외부자극) ⇒ <마음에서> ‘이 자식이 내가 만만해보이나?(생각 / 태도가 영향을 미쳐서)이 상황 엄청 싫은데?’(해석) ⇒ 뇌에게 ‘화남’ 신호 보냄(감정) ⇒ ‘나도 한 대 때려야 속이 시원하겠음’(판단, 결심) ⇒ 때림(행동) |
이렇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요약 하자면 마음은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생활 속에서 생각과 감정을 혼동한다. 그래서 공감이 어려운 것이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공감의 핵심은 상대방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인데 감정이 아닌 생각을 다루고 있으니 공감이 될 리가 만무하다. 왜냐하면 생각은 가치판단을 낳기 때문에 ‘옳다 / 그르다’의 논쟁으로 이어져 합의된 결론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듣기만 해도 복잡한 이 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나?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답을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정확한 용어가 합의되지 않으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다 열을 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감정에 직접적으로 다가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적어도 마음, 감정, 생각 정도는 구분하고 합의할 필요가 있다. 그럼 도대체 이 설명을 이해하는 초딩이 몇 명이나 될까? 엄청 많다. 3학년도 가능했다. 바로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통해서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다음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오해 둘. 공감 능력은 타고나야 하는 거야.]
모든 자질에는 태생적인 차이가 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부족을 노력을 통해 성취하는 과정이 인간의 발전이다. 그런데 우리는 학업적인 성취와 사회적 기술에 관한 성취에 대해 다른 잣대를 대는 경향이 있다. 성적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올릴 수 있는데 여러 사회적 기술(협동심, 배려, 공감 능력 등)은 타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공감 능력도 결국 뇌의 반응이며 얼마냐 연습하느냐에 따라 성취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덴마크 등의 국가에서는 ‘공감 교육’을 정규 교과에 편성해 학교에서 수업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행복지수 1위라는 결과를 이루어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어떤가? 잠시 자신이 한, 혹은 받은 ‘공감 교육’에 무엇이 있었는지 떠올려보자. 상담 중 받은(혹은 한) ‘니가 쟤라면 기분이 어떻겠냐?’라는 질문 이외의 장면이 하나라도 떠올랐다면 당신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공감 교육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국어 교과에서도 도덕 교과에서도 공감 능력을 강조하지만 해당 교과 공부의 장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공감’이라는 교과 수준의 교육이 필요하다.
[오해 셋. 공감한다 = 동의한다?]
공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 안 되는데 공감하려니까 어려워요.’라는 호소를 종종 듣는다. 공감하면 동의하는 거라는 오해 때문에 이런 반응들이 생긴다.
공감은 영어로 empathy이다. 이는 독일어 Einfühlung에서 파생된 것인데 감정 이입을 의미한다. 하지만 공감(empathy)은 동정(sympathy)과 구분되어야 한다. 동정은 독일어 ‘Sympathie’가 어원인데 그 사람의 감정에 동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는 것이고 동정은 아예 상대방의 감정에 빠져 동화되는 것이다.
공감 : 상대(슬픔) ⇒ 나(내가 상대라면 슬프겠다) - “너라면 그럴 수 있겠다 / ~하겠네.” 동정 : 상대(슬픔) ⇒ 나(슬픔, 안되었음, 어떡하지?) - “맞아, 맞아. 니 말이 맞아. 나도 슬퍼.” |
우리는 공감을 하는 것이지 동정을 하려는 게 아니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의 감정을 치유하고 도울 수 있지만 동정을 잘하는 사람은 오히려 감정적으로 얽매여 함께 늪에 빠져든다. 따라서 우리는 얼마든지 ‘정말 답답하겠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달라. 들어볼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해 넷. 내가 내 감정도 모를까봐?]
다시 이야기하자면 공감이란 ‘감(感)정을 공(共)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요 컨텐츠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정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생각보다 많은 어른들이 자신은 감정에 대해 잘 안다고 호언장담하는 걸 본다. 잠깐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 중 자신이 아는 걸 다 써보자.
꽤 많은 성인들에게 해보았는데 20개 이상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다툼을 중재하면서 감정을 물어보면 셋 중 하나다.
“기분이 안 좋았어요.”
“화가 났어요.”
“짜증났어요.”
아니면 판단/결심을 감정으로 착각하고 말하거나. 우리는 왜 이렇게 감정에 대해 무지한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감정에 대해 공부하고 생각하고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의 종류, 감정이 생기는 원리, 감정의 목적 등에 대해 수학 곱셈을 배우듯 배워본 적이 있는가? 사진이나 그림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추측하는 문제를 시험지에서 풀어본 적이 있는가? 단연컨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동안 감정은 이성적인 인간(Cogito, ergo sum)을 방해하는 미운 더부살이 객식구 정도로 치부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감정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따라서 감정도 공부하고 익히고 연습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앞으로 할 이야기의 육 할은 감정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오해 다섯. 감정적이지 않는 사람 = 잘 참는 사람?]
이 전제는 위의 오해에 이어 감정적이라는 게 부정적이라는 선입견에서 출발한다. 감정적이라는 건 감정에 휩싸여 올바른 판단이나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감정적인 사람과 지내는 것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렇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누가 감정적이지 않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잘 참는(대부분 이 때의 감정은 부정적 감정을 의미한다) 사람이 그러하고 그런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고 꾹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심리학 박사인 해롤드 시니츠키는 모든 감정에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냥 생기는 감정이라는 건 없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감정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이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매 순간 다른 감정들이 버튼을 ‘누른다’는 행위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 목적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인데 그 감정을 부정하고 참는다는 건 그 목적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 목적은 달성될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다른 부작용이나 결핍을 낳게 되는 것이다. 화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화를 참는다는 건 화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정 감정만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제약하고 누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 따른 스트레스와 압박이 다른 곳에서 진동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평화적이지 않은 방법(폭력, 소리 지르기 등)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 뒤 ‘내 감정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정말 감정 때문에 그런 거니 이해하고 용인해야 하는 걸까?
심리학자 크리스 코트먼은 모든 행동에는 자기 허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감정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는’ 행동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욕을 한 학생에게 이유를 물으면 ‘쟤가 먼저 몇 번이나 저를 열 받게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 학생에게 되물어 본다. ‘그럼 넌 똑같은 상황에서 부모님께도 같은 욕을 할 거니?’ 이 학생은 친구의 행동으로 인해 분노라는 감정이 생겼지만 똑같이 분노하더라도 부모님께는 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판단’을 통해 결심/행동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그 어떤 행동도 자기 스스로 허락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따라서 감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에 참지도, 휩쓸리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이 생기는 과정과 목적을 이해하고 감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쓸려가는 게 아니라 어떤 감정의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바깥에서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파악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오해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했다. 이 대답들이 공감 능력을 키우는 길에 큰 주춧돌이 될 것이다. 감정이라는 바다를 향해 돛을 올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