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화 : 교사가 아이를 얻었을 때
지난 주 토요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래미를 얻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이라고 했던가? 막상 내 아이를 얻고 나니 세상 모든 부모들이 그토록 아이를 극진하게 사랑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런 거룩하신 일을 해내신 아내느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솟았고 평생 두 여인네를 위해 충성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에 한 번 있을 일을 겪으며 든 생각과 느낌을 몇 가지 적는 것으로 이번 주는 대체하려 한다.
#장면1
아이들과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있었다. 내 앞에 앉은 가시내 둘이 나에게 물었다.
“쌤, 쌤은 애가 나중에 막 화내거나 그러면 야단 칠거에요?”
“글쎄?”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옆의 가시내가 거들었다.
“아냐, 쌤은 아이한테도 I message부터 하라고 하실 것 같아.”
“맞아 맞아. 심장호흡하고 나서. 애가 그러는 거 아냐? ‘아빠, 아빠가 내가 원하는 장난감을 안 사줘서 나는 속상해.’”
“ㅋㅋㅋㅋㅋㅋㅋ”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내가 진짜 모델링을 제대로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녀석들도 귀여웠다. 그러면서도 정말 어떻게 육아를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공부한 T.E.T나 P.D.C 모두 P.E.T와 P.D라는 부모교육을 기반으로 한 것들이기에 육아에 적화되어 있다. 실전으로 닥쳐봐야 알겠지만 원칙은 한 가지 생각했다.
‘내가 지키지 않는 것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설사 그게 우리 아이, 우리 반 아그들이라도.’
#장면2
아이 이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가시내들이 여러 이름을 쏟아내며 나를 압박했다.
라희, 라에몽, 로시, 토리 등
결국 좋은 이름을 골라서 드린 뒤 의미를 잘 붙여달라고 부모님께 부탁했다. 이렇게 부모가 정성을 다해 지은 이름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은 가지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름 가지고 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3
아이는 참 정직하다. 배가 고프면 울고 안아주고 밥을 주면 편안해한다. 쏟는 정성만큼 자라는 것 같다. 거기에는 지름길도 대단한 비법도 없다. 오로지 진심, 그리고 정성. 학급을 운영하는 것도 그러하다. 굉장한 학급경영 비법이 있고 아이들과 관계를 좋게 만드는 비기가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아니다. 물론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 수는 있지만 효과적인 ‘진심’은 없다. 마음으로 다가가고 그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아이 하나와 수 십 개의 인생을 행복하게 길러내는 길인 것 같다.
#장면4
아이가 생기고 나서 새로 생긴 버릇(?)이 있다. 바로 꼼꼼하게 찬찬히 살피는 것이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그냥 전체적으로 봤는데 이제는 꼼꼼하게 뜯어본다. 아이가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하루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이것인 듯하다. 자세히,찬찬히 보니 어제와 다른 모습이 보이고 하루 사이지만 쑥쑥 자란 것 같다. 그냥 봤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이제야 진정으로 동의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우리 반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학교로 돌아가면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를 천천히 뜯어봐야겠다.
#장면5
조리원에 있으니 산모들을 많이 본다. 그런데 이 초보 엄마들은 참 많은 것들을 서로 견준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우리 아이가 소중하니 그렇겠지만 괜히 옆의 엄마들보다 내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을 하기도 한다. 모유가 많이 나오는 엄마가 수유실에서 갑이고 나머지는 부러워하며 자책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엄마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지극하고 위대한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자식을 위해 하는 모든 것들과 희생이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의연하게 바른 생각을 해야 할 것 같다. 잘해준 친구가 다른 친구랑 떡볶이만 먹어도 속상한데 이렇게 정성을 쏟은 내 아이가 내 뜻대로 하지 않으면 얼마나 서운할까?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내가 안전하게 돌보고 오롯이 사랑하지만 내 것은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우리는 그걸 도울 뿐이다. 그리고 옆집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아이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 비교하는 마음, 그리고 자식에 대한 소유욕. 소중할수록 손에서 놓아야 한다. 물론 해탈의 경지가 필요하겠지만.나는 평소에 비교라는 것을 하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절대 안해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장면6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아이들을 보면 저마다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쪼그만 한 아기들인데도 눈이 큰 아이, 피부가 하얀 아이, 큰 아이, 작은 아이, 참 다양하다. 우리 아이는 머리숱이 많고 잘 먹는 아이로 통한다. 이 작은 녀석들도 이렇게 다른데 우리 반에 있는 그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저마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으며 서로 다른 십여 년의 세월을 살아 함께 모인 것이다. 그러니 다를 수밖에 없다. 다르니 낯선 것이고 그러니 다투는 것이다. 다름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재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금에 난리를 치는 정부의 획일화 프로젝트를 보며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어느 연수자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우리 반이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관계적 안전이 장치되어 있는 반이었으면 좋겠다.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그 어떤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해도 비난 받거나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는 반. 그런 다양함이 한데 모여야 진정한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것 아닐까? 무지개가 한 가지 색깔이면 얼마나 멋이 없을까?
문득 며칠 전이 떠올랐다. 우리 반에서 가장 많은 관심이 필요한 그 아이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저 축구공에 맞았으니까 축구하던 애들 한 대씩 다 때려줄래요.”
“헐, 맞아서 속상했구나. 그래서 때리고 싶어?”
“네, 안돼요? 왜 때리면 안 돼요? 저는 때리고 싶은데.”
보통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뭐 저런 못 배운 녀석이 있냐는 시선과 교사의 일장연설이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 반에서는 왜 때리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오갔다. 당연한걸 뭐 그리 시간 들여 이야기 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으랴?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발전의 촉진이고 민주주의의 밑거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