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3탄] 10. 참다 화내는 건 안하는 것만 못하다
교사의 대화에 대한 조언은 상당수가 교사의 평화적인 대화법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초등으로 한정해볼 경우 교사의 친절함은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교사가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친절함’이라는 의무감에 갇혀 제대로 의사 전달을 못하는 교사, 그 상황을 짚어 볼까 한다.
1. 신규의 딜레마
김교사는 올해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신규 교사다. 그녀는 다소 일방적이고 강압적이었던 학창시절 선생님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싶어 한다. 가능한 친절하게, 친구같이 지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선생님, 준영이가 자꾸 제가 적는 거 방해해요.”
“준영아, 그럼 수연이가 불편하잖아. 하지마세요.”
“네.”
하지만 상황은 반복된다.
“선생님, 준영이가 또 제 학습지에 낙서했어요!”
“준영아.”
“네, 안 하겠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김교사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참는다.
‘그래, 무조건 화를 내는 건 옳지 않아. 약속도 했으니 기다려보자.’
하지만 반복에 또 반복, 참다 참다 지친 김교사는 소리친다.
“이준영! 적당해 해야 할 것 아냐! 선생님이 얼마나 더 참아줘야 돼? 하지 말라고 했지!”
준영이는 평소와 다르게 소리 지르는 김교사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주변 친구들도 놀라서 쳐다본다. 김교사는 그동안 학생들에게 실망했던 것을 몰아서 쏘아 붙인다. 그리고 이내 실망한다.
‘아, 화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이 녀석들이 적당히 했어야지......’
그럼 김교사의 진심이 준영이에게 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아닐 가능성이 크다. 위의 모습은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교사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렇게 참고 기다려준 뒤 폭발하는 방법은 왜 통하지 않을까?
우선 학생에게 교사가 변덕스럽다는 인식을 준다. 교사의 일관성은 학생이 교사를 신뢰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그 일관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참다 폭발하는 게 왜 일관성을 잃는 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학생은 교사가 참았다는 사실은 모른다. 교사는 몇 번이고 참고 기회를 줬지만 학생에게는 그저 ‘그냥 넘어갔다.’ 정도로 인식될 뿐이다. 그래서 교사가 그 뒤에 화를 내면 ‘왜 뜬금없이 화를 내시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본인이 정당하고 교사가 이상하다는 방어적 논리까지 갖추게 된다. 그러다보니 학생 입장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교사가 어떨 때는 그냥 넘어가고 어떨 때는 화를 내는 게 되는 것이다. 변덕스러운 교사다.
두 번째로 교사가 일관성이 없다 보니 학생 입장에서 예측도 하기 어렵다. 예측 가능성 또한 학생이 교사를 신뢰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다. 학생은 교사의 반응이 예측 가능해야 능동적으로 계획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교사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으면 더 큰 힘을 가진 교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기분 좋으면 봐주고, 기분 나쁘면 혼내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교사의 태도가 학생의 반응을 만든다. ‘원래 그런 학생’이 아니라 교사의 태도가 ‘그런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학생의 행동은 교사에게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행동 양식이다.
2. 잡을 때는 잡아야지
신규 때, 혹은 지금도 선배들로부터 금과옥조처럼 듣는 조언이 있다.
“풀어줄 때는 풀어주더라도 잡을 때는 꽉 잡아야 해. 안 그럼 학생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른다.”
그 때 나는 마치 어부가 된 기분이었다. 학생들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권력의 우위에 있음을 인지 시켰다. 내키면 잘해줘서 나에게 환호하게 했다. 그렇게 밀당에 집착하는 학급 살이에 취해 갈 때였다.
아침에 들어갔는데 교실이 난장판이었다. 학생들은 떠들고 있었고 책상 위를 뛰어 다녔다.
“이것들이 미쳤나...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학생들은 나를 힐끗 볼 뿐 괘념치 않았다. 더 큰 목소리로 떠들고 뛰어다녔다.
“선생님 말이 안 들려? 말이 말 같지 않아?!”
하지만 아이들은 더 신나게 난리 칠뿐이었다.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 나는 나에게 방법이 더 없음을 깨달았다.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집요하게 떠들고 장난쳤다. 나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꿈이었다. 깨어나 보니 옷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에게는 최악의 악몽이었다. 물론 실제로 학생들이 그런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화가 통하지 않을 상황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흔히들 말하는 ‘잡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도대체 뭘 잡으라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다. ‘행동’이다. 학생들의 소위 말하는 ‘문제 행동’을 잡아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의미이다. 떠들거나 장난치거나 욕을 하거나 뛰는 것 등이다. 이게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살펴보면 이렇다.
학생들이 문제 행동을 한다 –> 교사가 화를 낸다 -> 학생들은 교사가 두려워 그 행동을 하지 않는다 -> 교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긴다
익숙한 메커니즘이다. 바로 ‘벌’이나 힘(Power)이 작동하는 과정과 똑같다. 이 순간에는 교사는 대화(말)를 했다기 보다는 ‘벌’을 줬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교사는 말로 학생을 때린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과정은 벌(부적 강화작용)과 같은 부작용들을 낳는다. 자발적으로는 권장 행동이 일어나지 않고 교사가 없으면 더 큰 힘으로 어긋난 행동을 한다. 이마저 익숙해지면 통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교사의 눈치를 보게 된다. 학생의 자존감은 낮아지며 교실은 독재 정권이 된다. 한 마디로 말로 때리면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논의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