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 촉진제 04>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 고미숙
* <절약 촉진제> 시리즈, 한 달 두 번 글을 씁니다. 한 번은 절약에 대한 에세이를, 또 한 번은 절약을 돕는 책 소개를 끄적여요. 오늘은 고미숙 선생님의 책을 추천합니다. :-)
정규직 말고 백수가 되라뇨?
나는 정규직이다. 한 달에 한 번 월급 꼬박 받고, 근로기준법 울타리 안에서 각종 노동권이 보장된다. 심지어 긴 육아휴직에 돌입했지만, 부담이 적다. 돌아갈 직장이 있는 덕분이다. 밥벌이에 부담 적어 정규직은 좋다.
102쪽. '삼포, 사포, N포 ...' 우리 시대 청년 세대를 표현하는 워딩이다. 뭘 포기한다는 것일까? 취업, 연애, 결혼, 출산, 육아 등이다. 요약하면 중산층 핵가족으로의 코스다. 그럼 이게 인생의 전부인가?
그런데 고미숙 작가는 백수로 살라고 한다. 하루 꼬박 일터에 메이지 않기 때문이다. 백수가 되어 지겨운 밥벌이에서 벗어나 책 읽고 토론하며 친구를 사귀는 소풍 같은 나날을 보낼 수 있다고 한다. 취업, 연애, 결혼, 출산, 육아. 즉 중산층 핵가족의 삶만 정답이 아니니, 백수의 삶이라고 겁부터 낼 필요 없다고 말이다.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를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막 덮었을 때는 가슴이 벅찼다. 백수는 아니었지만, 백수의 자질을 갖추려 노력한 나날을 보상 받는 기분이 들었다. 밥알의 등급이나 옷감의 질보다, 친구와 책, 수다, 토론, 산책이 풍성할수록 사는 맛이 났다. 돈 보다 '나는 누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책 읽는 시간이 좋았다.
"'나는 누구?'를 질문하고 답 찾는 일도 돈 있고, 시간 있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돈 없고, 시간 없는 이들에게 한량 스러운 나날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왠지 풍요로운 백수 같은 삶을 살기위해서는 굶어죽을 걱정 없도록 단단히 준비해두는게 먼저 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안정감 느낄만한 자산'의 규모는 소비 습관과 욕망 패턴을 조절할 수 없는한 평생 갖추기 어렵다. 안정된 직장이 평생 화창한 나날을 보장하지 못 했다. 정규직만 되면 아무 걱정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사회 곳곳 은연중에 퍼져있는 '번듯한 중산층의 삶'을 좇아가다보니 힘들었다. 실컷 쓰고도 돈이 남는 중산층은 신기루, 판타지다.
버는 돈보다 씀씀이를 조절하는게 밥벌이 고민에서 벗어나는 최단코스다. 돈과 시간을 더 모으고 나서 행복하게 사는게 아니라, 돈과 시간 씀씀이를 조절할 줄 알아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 하며 살 수 있다.
165쪽. 정규직은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해 자본을 모으지만, 백수는 떠나기 위해 노잣돈을 모은다.
그래서 멈췄다. 먹고 사는 일을 해결했으니 나머지는 좋아하는 일만 하고 싶었다. 의, 식, 주에 대한 기준치를 자꾸 높이지 않았다. 강과 산이 보이는 지방의 아담한 아파트에서, 하루 세 끼 반찬 한 두가지만 놓은 집밥을 먹고, 유행에 따라 옷을 사대지 않고 목이 늘어나고 무릎이 튀어나올 즈음 새 옷을 샀다.
백수는 생계 해결만 되면 욕망, 소비, 쾌락 말고 다른 고민을 시작한다. 청춘을 무엇 하며 보낼지, 친구와 언제 어디서 만날지, 다음 읽을 책은 뭘로 할지, 어떤 악기를 연주하고, 어떤 풍경을 그림으로 그릴지. 커다란 꿈 없이 살 수 없겠지만, 일상의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없이 사는건 더욱 치명적이다. 시들시들하고 재미 없다.
12쪽. 고귀한 삶의 척도는 육체적 노동과 물질적 생산이 아니라 정신적 깊이와 지적 확장이라는 의미다. 지금까지 그런 활동은 소수에게만 허용되었지만, 4차산업혁명과 더불어 그런 삶의 가능성이 모두에게 열린 것이다.
...
해서, 이제 청년들은 정규직을 향해 올인할 것이 아니라 '노동 해방'이라는 이 시대정신을 기꺼이 향유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고미숙 작가의 말처럼 당장 백수로 살라는건 어렵다. 일단 내가 순도 100% 슬기로운 백수가 되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조선 백수에 대한 낙관을 경계 한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는 내가 백수로 살아도 내 자식은 백수로 살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다르다. 안타깝게도 전 세계 유례 없는 '부가 대물림 되는 나라', '돈이 돈을 버는 나라'다. 거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보다 부의 대물림 지수가 3배 높다. 비정규직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의 혹독한 노동환경도 무시할 수 없기도 하다. 백수의 삶을 상상해서 '좋다', '의지의 문제', '생각하기 나름'이라며 함부로 찬양할 수 없다.
다만 내 경험 한계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있다. 백수 씀씀이와 다름 없는 소박한 직장인의 삶은 반쯤 유토피아에 가깝다는 경험담이다.
망한 삶이 어디있겠어요.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를 읽고 나서도, 결코 퇴사를 꿈꾸지 못 하겠다. 독자가 쉽게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책을 쓴 고미숙 작가가 이상주의자 같다. 그렇지만 가슴 벅차게 읽었다. 오랜만에 소박한 삶에 힘 실어 줄 단단한 철학서를 만난 덕이다.
이 책을 읽고, 이제 세상이 한결 덜 두렵다. 미래가 두렵고 불안한 이유는 결국 먹고 사는게 오늘 같지 않을까봐다. 대한민국에서 굶지는 않는다. 밥이라고 다 같은 밥이 아니기에 불안할 뿐, 과한 걱정만 떨치면 될 일이다. 고미숙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면, 퍽퍽한 밥을 먹어도, 허름한 차림새를 해도 상관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은 돈으로 밥과 옷을 해결하는 방법이야 찾을 수 있고, 적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없진 않다.
소비와 욕망, 쾌락을 조절할 줄 안다면, 밥벌이에 골몰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하면 쉽게 돈 벌어 실컷 쓰지?'하던 질문 종료! 다른 고민에 접어든다. 차원이 다르다. 날씨도 좋은데 어디 산책을 갈지, 어떤 책을 읽고 누구와 토론할지, 나는 누구인지, 오늘은 어떤 글을 쓸지. 지겨운 월급 노동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205쪽. 노마드가 되려면 가벼워야 한다. 가벼운 자만이 떠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소유를 중심으로 인생을 기획하는 일을 멈추면 된다. 집을 사고 인테리어를 하고 증식을 위한 투자를 하고 노후를 위한 보험을 들고... 이런 따위의 일만 안 해도 인생은 충분히 가볍다.
망한다 해도 내 삶은 무너지지 않을 거란 자신감. 외부 상황을 덜 두려워하는 태도는 오늘에 집중하게 한다. 그 자신감은 바로 번 돈 보다 적게 쓰는 습관, 그리고 적게 소유하고 더 크게 존재하고자 하는 의욕에서 나온다. 그 결과 소비 욕망보다 가족, 자연, 친구, 독서, 글이라는 자본이 덜 드는 욕망의 방향으로 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벌이가 많든 적든 잃고 친구 만나고플 때 만나고, 내 새끼 보고 싶을 때 보고, 책 읽고 싶을 때 읽는 질적 자유. 친구를 만나러 가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며,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뒹군다.
백수만 할 수 있겠나. 직장인들도 할 수 있다. 백수의 태도를 갖춘 직장인으로서 살고 싶다.
250쪽. 운명의 키는 바로 자기 자신, 특히 욕망과 습관의 패턴에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노동과 화폐, 소비와 쾌락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자본의 기준에선 무용하지만 삶의 관점에선 실로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