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장 도전기 -4-
우리 회식이라도 한 번 해요!
현재 나의 부서는 미래 지향적이고 최신의 기술을 다룰 것만 같은 명칭의 '미래인재부'이다. 내 친구는 듣자 마자 S모 그룹의 '미래전략실'을 벤치 마킹한 것이 아니냐 하며 '풉' 하고 웃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각종 전산 업무와 과학실 관리, 영재학급 운영, 방송실, 그리고....... 학교 텃밭 관리가 주요한 업무 목록이다. 아쉽게도 올해는 학교 텃밭이 주차 공간으로 바뀌어 미래 인재의 필수 역량인 농사일은 빠지게 되었다.
부서는 참으로 단촐한데 단위학교 영재학급을 맡은 A 선생님, 그리고 스스로 각종 게임과 장비 덕후라 칭하는 B전산 실무원. 그리고 퇴임을 6개월 앞두신 C과학 실무사님이 계신다. 작년까지는 계속 6학년 담임을 맡아 왔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6학년의 경우 생활지도로 인해 업무 제외였기 때문에 나는 '동학년'에만 속해 있었다. 나는 6학년 끝반이라 내 교실은 건물로 치면 옥탑방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옆반도 빈 특수교실 공간이라 우리 반이 복도에서 레슬링을 하건, 교실에서 다같이 떼창을 하건, 춤을 추고 놀건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현 학교에서 나의 2년 동안은 우리 동학년 선생님들 외에는 다른 학년에 어떤 선생님이 계신 줄 잘 몰랐다. 당연히 우리 학교 선생님들 중에서도 내가 우리학교 교사인줄 모르는 분들도 계셨다.
좁고 좁았던 학교의 인간 관계에서 B전산 실무원님과는 그래도 몇 번 뵌적이 있었는데 사실 매우 어색한 사이였다. 딱히 친해질 일도 없었고 오히려 부탁 드린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실 때 말투가 조금 까칠하다고 느껴져서 그냥 저냥 한달에 한 번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만 하고 넘어가던 사이였다. 하지만 올해, 내가 학교에서 새로 얻은 관계가 있다면 B 전산실무원님과의 끈끈한 전우애가 아닐까 싶다.
2월 말 인수인계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 해보는 일들은 여전히 눈에 익지 않았고 예산들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작년도 부장 선생님의 기안문과 첨부 파일들을 보며 드문드문 준비하고 있던 차에, 정말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올 상반기 일상을 완전히 바꿔버린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고 우리 모두가 겪고 있듯 업무 진행도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 부서의 한정된 예산들 내에서, '일단 사고 나면 나중에 주겠다'는 조건으로 온라인 수업을 위한 예산들을 사용해야 했다. 내가 제일 비싸게 질러 본 돈이라고는 예전 노트북 살 때 120만원이 최대였던 것 같은데 공문에 내려온 예산은 단위가 훨씬 컸고 이걸 어떻게 써야 효율적으로 잘 사용한 것일까, 참 막막했다. 막막했던 것들을 꼽으라면 사실 더 많지만, 일단 당장 급하게 다가온 일은 그것이었다.
3-4월 막막했던 이 때에, 나와 같이 고민을 나눠준 분이 바로 B전산 실무원님이었다. 내 개인 돈은 아니지만 내 개인의 돈이 아닌 것도 아니기에 이 예산을 좀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이런 저런 요청에 언제나 최고의 가성비 제품을 추천해 주었고 마통 뚫는 것 마냥 예산을 마련해야 했을 땐 급하지 않은 예산들 위주로 알려주어 예산 돌려막기 계획을 도와 주었다. 빌려썼던 예산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우리는 만날때마다 프린트 토너값 걱정하느라 정신 없지만 그래도 올해 B 전산 실무원님과 참 돈독한 관계가 되어 다행이다 싶다. 이야기 하다 보니 실무원님도 사실 작년에 이것 저것 부탁하는 6학년 끝반 선생님이 좀 번거롭긴 했지만 그래도 수업 준비하느라 이것 저것 신경 많이 쓰는구나 싶었다며 우리 나름의 뒷 이야기도 나눴다. 결론은 둘다 서로 첫 인상은 그닥이었는데 올해 3-4월의 큰 산들이 불타는 전우애를 태우게 만들어 주었다.
전산 실무원님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판 엎어진 영재학급 운영 계획서 몇 번이고 만들어 주시는 A 선생님, 그리고 사실 아직 어색하긴 하지만 점심시간에 마주치면 가끔 많이 바쁘잖냐며 인사 건네 주시는 C과학 실무사님 덕분에 상반기는 어째저째 큰 구멍 없이 맷돌 굴려본 것 같다. 학교 여러 선생님들께 참 많은 도움을 받지만, 특히 우리 부서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올해 첫 부장 도전기는 여러 끈끈한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요즘 시대에 회식 제안은 "꼰대" 사고라고들 하지만 이런 저런 감사한 마음에, 그리고 같은 일을 서로 으쌰하며 해낸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에, 이런 제안들을 하시게 되나 보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중, B전산 실무원님께 제안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끝나면, 우리 회식이라도 한 번 해요!".
제안하고 나니 괜히 아 내가 너무 나갔나, 싫어하면 어쩌지 쭈굴해졌지만. 다행히 B전산 실무원님은 그렇다면 여기가 어떻겠냐고 수제 맥주집을 제안해 주셨다. 아 얼른 코로나 끝나고 조촐하게 회식하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