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예찬
차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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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0 16:35
얼마 전 종로 5가 Y 출판사에 계약 이전 관련 서류 작업이 필요하여 다녀왔다. 이날은 하필 제일 더울 시간인 5교시에 야외에서 체육 수업을 하고 온 날이라 머리도 땀에 젖었던 상태였고 털어낸다고 털어냈는데도 운동화에는 흙먼지가 아직 묻어 있었다. 직장인 치고는 약간 자유분방한 상태로 Y 출판사의 9층 본사에 방문했고 담당자 분을 찾아가 인사를 나눴다.
방문한 목적인 서류 작업을 위해 조그마한 회의실 공간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매번 문자와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눴던 분을 직접 만나뵙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누고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해당 학교에서 근무중인 교사 차유미라고 소개를 드렸다. 그 때 그 분의 이야기가 참 낯익었다.
"아, 선생님도 명함이 있으신가요?"
그날 내가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 그렇게 물어보신 것인지, 아니면 교사는 명함이 없는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괜히 내가 직장인 처럼 보이질 않나 싶은 생각과 함께 반대로 의문이 들었다. 왜 교사의 명함에 이토록 어색한 반응을 보일까. 교사는 당연히 명함 사용 안할 직업인가.
사실, 이 이야기는 참 여러 번 들었다. 조금 더 오래 전에 박람회를 방문하여 관심 있는 부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쪽에서 먼저 명함을 건네주셔서, 나도 명함을 건네 드렸더니 그 때도 비슷한 이야기였다. 선생님이 명함이 있느냐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교사들과의 만남에서 더 자주 듣게 되는 편이다. 아무래도 외부인 보다는 선생님들과 더 자주 만날일이 많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앞으로도 이분과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어질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명함을 건네면 대부분 물어본다. 어째서 명함이 있느냐, 너네 학교는 명함을 만드는구나. 등등.그렇다면, 선생님은 정말로 명함이 필요 없는가? 학교 업무 추진을 위해 예산으로 명함을 제작하면 안되는 것인가?
몇 년 전, 서울시교육청에서 선생님의 명함 제작을 위한 예산을 편성한 적이 있었다. 해당 시기에는 다른 지역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학교 현장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관련 사업에 대한 몇 개의 기사를 읽어 보았을 때 교육청에서는 학교 현장 교사의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 명함 제작 예산으로 500만원을 책정하였고, 실제로 교사 60여명 정도가 신청하였으며 현장에서는 쓸데없는 돈을 사용했다는 분위기가 많았다, 는 내용이 많다.
(출처: 연합뉴스 인터넷 페이지)
나는 개인적으로 예찬에 가까운 명함 선호자다. 명함을 주고 받을 때의 상황이 참 좋다.
2015년도,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회사에 들어갔을 때 정식 출근을 몇 일 앞두고 사무실에 들렀던 날. 우리 회사 대표였던 선배는 내 이름이 인쇄된 명함 박스를 주었다. 뒷면에는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앞에는 부서명, 그리고 내가 하는 일, 내 이름, 연락처, 이메일이 적혀 있었다. 당연히 내것 뿐만 아니라 우리 팀원들 모두 명함을 갖고 있었다. 100장 정도 되는 명함을 갖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나에게 명함이 있다는 것을 자꾸 까먹어서 외부에 일이 있어 나갈 때마다 명함을 놓고 온 적도 몇 번 있었다.
회사 생활의 A 부터 Z까지 알려주신 똑똑하고 인내심 많은 우리 대표이자 선배 덕분에 명함 사용 매너에 대해 배웠다. 처음 가면 어린 사람부터 명함을 드리고, 이야기가 끝날 때 까지는 명함을 집어 넣지 않고 테이블 옆에 잠깐 두었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명함을 꼭 챙겨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명함에 그 사람과 나눴던 이야기, 특징, 앞으로 연락해드려야 할 일이 있다면 명함 빈 곳에 가볍게 메모를 해 두어 사용하는 것도 편리하다는 꿀팁까지 전수 받았다. 그 이후로나에게 명함은 직장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 되었다.
회사생활을 끝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학기초가 되니 명함이 없어 뭔가 허전하고 심심했다. 학교 교무실과 행정실에 혹시나 명함을 제작할 수 있는지 여쭤 보았더니 해당 학교는 명함을 따로 신청하는 업체가 있다고 하셨다. 비용은 개인 부담이지만 명함을 제작하는 데에 생각보다 큰 가격이 들지 않았다. 학교 로고와 내 직급인 교사, 이름, 연락처를 넣어 150장을 받았다. 그 때의 명함은 학부모 상담때도 드리고 여기저기서 처음 만나뵙게 되는 교사, 그리고 교사가 아닌 분들도 연락을 주고 받을 일이 있다면 명함을 건넸다.
2018년도 서울에서 5년 간 새로 근무해야 할 학교로 옮긴 뒤 이번에도 교무실에 명함 제작을 여쭤 보았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명함을 제작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이번엔 직접 명함 디자인 제작 사이트를 찾아 보았다. 교무 실무사님께 학교 로고 파일을 받아서 적절한 명함 제작 사이트에 디자인을 의뢰하니, 디자인 제작부터 앞쪽엔 한글, 뒤쪽엔 영문으로 표기하여 200장 기준에 2만 5천원이 들었다. 앞으로 5년 간 이 200장이면 사용하는데 부족함 없이 충분할 듯 했다.
명함이 생기고 학교 내에서도 생각보다 유용하게 사용했다. 이전엔 따로 번호를 물어보시는 경우 포스트잇에 예쁜 손글씨로 적어 알려 드렸지만 지금은 학부모님들 중 연락처를 물어보실 때에는 명함을 건네 드린다. 명함 위에 놓인 번호는 조금 더 '사무적'이고 '직업적'인 번호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번호는 야매가 아니다. 공식적이며 업무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번호이다. 물론 그냥 알려드릴 때에도 공식적이고 업무적인 성향을 띌 수 있지만 명함을 한 번 거치면 확실히 공식적이고 업무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
교사 모임에서도, 교사 외적 모임에서도 나는 이러한 직장에서, 이러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누구이며 만약 이 영역과 관련하여 논의가 필요한 경우 해당 번호 및 이메일로 연락해 주기를 가장 자존감 높게,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2만 5천원으로 5년 간 충분히 쓰고 남을 '비지니스 카드'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을 듯 싶다. 학생 출결, 생활 및 진로 상담 등 업무적으로 교사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을 때 기분 좋게 명함을 내밀 수 있으니 말이다. 1년에 5천원 꼴인데 나의 자존감 높이기에 이만큼 가성비 좋은 물건이 없다. 물론 학교 업무 예산으로 제작 가능한 것이라면 더더더 만족하지 않을까.